[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루터보다 6년 앞서 부패한 교황권을 신랄하게 풍자

1516년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헬라어 신약성경.
 
에라스무스의 초상화.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로 전락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실상을 대담하게 묘사했던 ‘우신예찬’ 표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성로렌스성당앞에 설치된 에라스무스 동상.
 
서대천 목사


16세기 종교개혁은 지성계의 인문주의운동과 예술계의 르네상스운동의 연동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중세의 오랜 영적 암흑기 끝자락에서 연쇄적으로 촉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당시 로마 교황권의 전횡이 가져온 필연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당시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사상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을 통해 그 구체적인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길을 닦은 인문주의자

필자는 16세기 최고의 인문주의자로서 당시 부패한 교황권을 신랄하게 풍자한 ‘우신예찬(愚神禮讚)’의 저자 에라스무스를 찾아 네덜란드로 발을 옮겼다. 그가 머물렀던 스위스 바젤을 거쳐 출생지인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답사하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새삼 깨닫게 됐다. 우신예찬 출판 연도는 1511년으로,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에서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1517년보다 6년이나 앞선다.

에라스무스가 1509년 알프스를 여행하면서 착상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 경의 집에 머물며 열흘 만에 탈고한 ‘어리석은 신에 대한 예찬’ 속에는 당시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로 전락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실상이 대담하게 묘사돼 있다. 가령 “만일 교황이 기독교의 대리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불행한 생애를 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교황은 영화나 누리며 행복 속에 살고 있다”라는 비판은 교권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이처럼 에라스무스는 당시 성직자들의 부패상과 수도사들의 편협성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당시 세인들에게 주목받고 인기를 끈 ‘문제의 작품’을 어째서 교황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참으로 의아했다. 심지어 교황 레오 10세는 이 책을 흥미 있게 읽었다 하니 더욱 놀랄 일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가들은 폭풍 전야 같은 시기에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 준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는 것 같다.

이외에도 에라스무스는 최초의 헬라어 신약 성경 편집으로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제공함으로써 신학적으로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역사가들은 에라스무스를 종교개혁의 우군(友軍)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슬픈 출생의 비밀과 기나긴 수도원 생활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에서 1466년 10월 27일 사제인 로저 제라드와 의사 딸인 마가렛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아들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아 호적상 사생아 신세가 됐다. 소년 에라스무스는 9세 되던 1475년부터 아버지가 사망한 1483년까지 8년간 데벤터에 있는 성 레빈 소년학교에서 지냈다. 그는 어린 시절 가장 큰 낙이 독서였으며 타고난 천재성으로 12세에 벌써 고대 로마 서정시인 호라티우스와 로마 극작가인 테렌티우스의 시를 암기할 정도였다.

어머니마저 여읜 뒤에는 후견인에게 유산을 강탈당하고 형 피터와 함께 수도원에 보내져 5년(1486∼1491)을 보내게 되는데, 이런 쓰라린 경험 때문에 일생동안 수도원주의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됐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수도원 생활을 통해 고전(古典)을 접하게 되어 스승도 없이 시와 산문,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모에게 바치는 송가를 공부하며 영성과 내면의 세계를 다졌다.

기회만 있으면 수도원을 벗어나고자 한 그는 캉브레 주교에 의해 5년 만에 수도원에서 풀려나 1492년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그 후 어느 친구의 도움으로 파리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 그는 꼴레쥬 몽테규와 오를레앙대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슬픈 출생의 비밀을 안고 고아 같은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그의 학문은 당대 그 어떤 인문주의자들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여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흠모의 대상이 됐다.

에라스무스는 일생동안 영국을 두 번 방문했다. 평소 그를 존경한 제자 마운트조이 경의 초대를 받아 처음 간 그는 토머스 모어 경을 비롯한 당대 유명한 학자들과 성직자들을 사귀었으며 국왕 헨리 7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두 번째 영국 방문 시에는 마가렛대학의 신학교수와 케임브리지대 헬라어 강사가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지금도 케임브리지대 퀸스칼리지는 그가 사용하던 방을 보전하여 순례자들에게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중간자(中間子)로서 종교개혁을 지원

에라스무스는 16세기의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박학한 최고 인문주의 학자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와 종교개혁의 관계를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에라스무스의 생애’를 쓴 예일대 교수 롤랜드 베인턴은 “에라스무스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교회 지도자가 아니었으나 가톨릭으로부터는 파괴적인 인물로 배척당했고, 프로테스탄트로부터는 도피적인 인물로 배척당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자 간의 대화와 이해를 위해서도 중요한 인물”이라며 중간자로서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일생동안 가톨릭교회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1559년 교황 바오로 4세는 그의 저서에 개혁사상이 있다하여 종교와 관련이 없는 그의 책까지도 금서로 취급했다. 이후 트렌트공의회에서 완화돼 불온한 부분들을 삭제한 판본들은 허용됐지만 사후에도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필자는 이번 답사를 통해 그가 프로테스탄트에 적극 협력하지 않았다는 역사적인 평가에 수긍이 갔다.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폐습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개혁하기를 원했으며 루터처럼 과격한 방법은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가 필립 샤프는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사상보다도 그 태도에 반대했던 것이며, 평민에게서나 볼 수 있는 루터의 과격한 언행이 그의 세련된 취향에 거슬렸던 것”이라면서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했다.

루터는 이러한 에라스무스를 두고 “행동 없이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루터가 파문당하기 전인 1519년 11월 마인츠 대주교 추기경 알브레히트에게 편지를 보내 “만약 루터가 무고하다면 저는 그가 악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혹시 그에게 오류가 있다해도 저는 그가 멸망하기보다는 차라리 옳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루터를 변호했다고 한다. 루터가 파문당한 후 1520년 9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루터를 두둔했다.

최초의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성경’은 성경해석학에 크게 공헌한 책으로 프로테스탄트 성경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고전을 쓰고 암기할 만큼 능통한 라틴어 실력으로 헬라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으로’라는 모토에 부합한 사건으로 당시 걸음마 단계에 있던 성경연구에 불을 붙였다. 주목할 것은 ‘헬라어 신약성경’의 출판이 1516년인데,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도 1년 앞선다는 사실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오직 성경’으로 가능하다.

글·사진=서대천 목사(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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