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칼뱅 개혁사상 위그노가 삶에서 실천… 세계의 변화 이끌어

위그노 화가였던 프랑스와 뒤부아가 1572년 발표한 ‘성 바돌로매 축일 대학살’ 그림으로 당시 위그노 박해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았다.
 
스위스 로잔의 위그노 신학교 전경.
 
앙리 4세가 1598년 4월 13일 선포한 낭트칙령.


칼뱅의 개혁사상 중심에는 ‘경건과 지식’이 있다. 참된 신앙인은 올바른 경건과 올바른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제3권 2장은 “믿음은 소위 경건한 무식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다”고 밝혔다. 위그노들은 이러한 경건과 지식을 추구한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아울러 칼뱅의 개혁사상 중심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직업소명’이 있다. 위그노들은 이러한 직업소명에 충실한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가톨릭의 박해로 흩어진 위그노들은 순교적 신앙과 고도의 전문지식, 그리고 투철한 직업소명 의식으로 유럽과 세계를 변화시켰다.

칼뱅의 경건과 지식, 직업소명 실천

프랑스에서의 참혹한 위그노 순교 현장을 답사한 필자는 스위스에서 독특한 위그노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은 로잔에 남아 있는 위그노신학교였다. 1729년을 전후해 개혁자 앙투안 쿠르와 벤자민 뒤플랑에 의해 세워진 이 학교는 망명지인 타국에서라도 복음사역자를 양성, 프랑스로 재침투 시키겠다는 위그노들의 감당치 못할 신앙의 상징이었다. 칼뱅 당시에도 구약의 ‘엘리사 생도학교(왕하 2:3∼7, 6:1∼2)’ 같은 소규모 위그노 신앙교육 공동체가 스위스 등 해외에 자생적으로 생겼다고 한다.

이 신학교 졸업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누구든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이 학교를 찾았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혁교회에 대한 핍박이 극에 달했을 때, 망명지에서 신학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고 대다수는 순교했다. 많은 사명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사각오로 이 학교를 찾았고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해 조국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칼뱅은 조국을 떠나온 위그노들을 적극 도왔으며, 조국에 남아 있는 위그노 교회공동체에 예배와 예전 등의 규례를 만들어 전했다. 또 그들에게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꾸준히 권고함으로써 그의 개혁사상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폭력 평화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칼뱅은 평소 성도의 온전한 신앙을 위해서 ‘경건과 지식’을 강조했는데, 그 전형적인 모델을 위그노의 신앙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 9:10)는 성경 말씀을 중시해 제네바 아카데미의 교훈으로 삼았다. 믿음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믿음을 더하는 경건과 지식의 상호관계성을 중시했다.

오늘날 신학계와 기독교 교육계에서 ‘경건과 학문’ 또는 ‘신앙과 교육’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칼뱅의 개혁주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칼뱅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고 위그노신학교를 지원함으로써 경건과 지식을 실천했다. 위그노들은 이러한 칼뱅의 개혁사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당시 프랑스 최고 엘리트 계층의 프로테스탄트였다.

칼뱅의 개혁사상 중심에는 성경적인 ‘직업소명’ 의식이 있다.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이를 적극 실천한 부류 역시 위그노들이었다. 오랜 가톨릭교회의 전통 속에서는 성직자들과 귀족계급 외에 절대 다수의 노예와 서민들은 삶을 굴레 씌워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 직업의식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루터조차도 직업을 ‘인간이 순응하고 만족해야 할 타고난 운명’으로 소극적인 생각을 한 반면, 칼뱅은 ‘직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은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 노동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직업관으로 성도들을 가르쳤다. 이것이 칼뱅의 직업소명으로 그의 개혁사상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는 칼뱅의 개혁사상에 내재된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와 직업소명이 서구의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각처에서 꽃을 피운 위그노들

초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듯이, 위그노들도 박해를 피해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1598년의 낭트칙령으로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권리를 보장받게 되자 위그노들은 숙련된 기술로 열심히 일해 짧은 시간에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가톨릭교회의 우려와 불만이 고조되어 도처에서 위그노에 대한 잦은 폭력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572년에 일어난 성 바돌로매 축일 사건으로 수만 명의 위그노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개신교의 원조라 할 위그노의 당시 신앙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칼뱅처럼 자신의 신분을 숨기거나 도피자의 삶을 살면서도 그들은 비밀교회에 모여 목숨 걸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다.

바시의 어느 곡물창고를 이용한 위그노 집회에서는 가톨릭교도들이 군인들을 동원해 총과 칼로 죽이고 불을 질러 일시에 2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마치 일제가 저지른 제암교회 방화사건을 연상케 했다. 위그노들이 이처럼 살벌한 상황 속에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과 경제활동을 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필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산업의 역군으로 프랑스 경제를 떠받들며 일하던 30만명의 위그노들은 낭트칙령이 폐기되면서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지자 유럽 각지와 미국 등지로 탈출 러시를 이루었다. 프랑스를 탈출한 위그노 대다수는 당시 사회 각 분야에서 상류 계층을 형성한 지식인들이었으며, 시계 등 정밀산업을 비롯한 제철과 염료, 화학 분야에서 당시로서는 하이테크 기술보유자들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당시 해외로 이주한 위그노는 네덜란드 6만5000명, 독일 3만명, 스위스 2만5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기의 프랑스 경제 쇠퇴의 원인을 위그노의 대량 해외탈출과 연관 지어 분석한 막스 베버의 통찰력은 참으로 놀랍다.

영국 찰스 2세는 특별이민법을 만들어 뛰어난 기술을 가진 위그노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영국으로 건너간 위그노들은 증기기관 기술과 면방직 공업의 기틀을 마련해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스위스로 탈출한 위그노들은 시계 제작기술을 전수해 정밀 산업을 육성했으며 의약품 제조기술을 가르쳐 오늘의 스위스 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독일도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위그노들을 적극 받아들여 철강 산업을 일으켰다. 미국으로 건너간 위그노들은 탄약 기술로 미국이 개척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칼뱅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인 위그노들은 칼뱅이 강조한 경건과 지식, 그리고 직업소명 의식으로 가는 곳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꽃을 피우는 한편, 자본주의 경제의 기반을 구축했다. 위그노의 영향력은 지금도 살아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칼뱅의 직업 소명의 본의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목회자와 성도부터 정직한 직업 소명 의식을 회복해야 하며, 이것이 사회로 파급되어 부패한 ‘천민자본주의’가 깨끗한 ‘성민자본주의’로 바뀌어야 한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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