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오직 그리스도’ 향한 순교자들 믿음이 종교개혁 이뤘다

1562년 3월 로마 가톨릭주의자인 기즈 가문이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들을 총과 칼로 죽이며 화형을 시켰던 곳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바시의 노르트담 성당.
 
당시 위그노들을 처형했던 바시의 곡물창고.
 
파리 노르트담 대성당 부근의 위그노 처형 장소.


필자는 프랑스의 위그노 수난 현장을 답사하면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테르툴리안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우리가 살아서 사도행전 28장 이후를 쓰고 있는 것도 그때 목숨 걸고 복음을 사수한 신앙의 선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그노 최대 순교지인 파리에서 출발해 북쪽 인근의 모(Meaux)를 거쳐 칼뱅의 출생지 느와용, 위그노 대량 학살지인 바시를 방문하며 필자의 발걸음이 영혼의 사치가 아니기를 기도했다.

기독교 순교의 상징, 위그노 수난 현장

위그노의 순교 현장은 “만일 종교개혁을 탄압한 재앙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월등한 개신교 국가가 됐을 것”이라고 한 프랑스의 신학자 새뮤얼 무르의 말을 실감나게 했다. 프로테스탄트 수난의 역사 중 프랑스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른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기독교 박해사에 대한 성도들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게 사실이다.

위그노라는 말은 ‘동맹자’라는 뜻으로 프랑스 칼뱅주의 개혁파에 대한 칭호이다. 원래 개신교도를 핍박한 자들이 사용한 명칭인데, 필자는 그들의 수난사를 확인하면서 차라리 ‘순교의 신앙동지’라고 부르고 싶었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연원을 가톨릭교회의 외적 예배 형식과 화체설(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설)을 배격한 쟈크 르페브르의 1512년 개혁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독일의 루터 개혁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선다고 할 수 있다(르페브르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한 기욤 파렐의 스승이다).

16세기 개혁운동은 각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일종의 시대적 도미노현상으로 예술계에서 르네상스 운동과 학문계의 인문주의 운동, 정신계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와 시골, 가정과 직장, 귀족과 농부, 노동자와 자본가 등 삶의 전 영역과 사회 모든 계층에서 공감되게 나타났다.

위그노 활동은 영적 카이로스(하나님의 특별한 시간) 속에서 칼뱅의 제네바 개혁사상에 자극받아 시작됐다. 당시 위그노들은 칼뱅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며 ‘기독교강요’ 제3권 6∼10장에 명시된 크리스천의 생활규범을 따랐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 주님의 것이라면 생활의 모든 행위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롬 14:8).”

고난 받는 형제들을 위한 칼뱅의 노력

이러한 칼뱅의 권유와 가르침에 영향 받은 위그노들은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를 거부하며 당국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비밀집회를 열어 모이기 시작했다. 1555년에는 5개에 불과했던 교회 조직이 4년 후에는 100여 개로 늘어났으며, 종교전쟁(위그노 전쟁)이 시작된 1562년에는 무려 2150개의 교회공동체로 급증했다고 한다. 세계교회 역사상 불과 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처럼 폭발적으로 교회가 급증한 사례가 또 있었던가. 필자는 이것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생하는 가정교회나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갖는 셀 교회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큰 부흥을 이룬 위그노는 1559년 파리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고 ‘프랑스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로서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로마 가톨릭주의자인 기즈(Guises) 가문과 심각한 충돌을 빚게 됐다. 특히 1562년 3월에는 바시 노트르담 성당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들을 기즈 가문이 무력으로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부터 프랑스 내에 긴 종교전쟁이 시작됐다. 무려 30년 이상 지속된 내전으로 3만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됐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200여m 떨어진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매일 화형 당하는 위그노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육신이 타는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칼뱅은 순교자와 투옥돼 고문당하는 성도들이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도록 그가 성경적으로 확고히 믿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교리를 조국의 성도들에게 서신으로 전하며 비상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심어 놓으신 능력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싸움에 대해 이미 오랫동안 숙고해 왔습니다. 그 싸움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진대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은 세상보다 강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폭동은 삼가시오!”

대학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파리 근교와 모, 바시 등 위그노의 예배처소가 있는 곳이면 끔찍한 살해와 폭력이 가해졌다. 1598년 낭트칙령이 발표돼 위그노에게 종교·정치적 권리가 부여됐으나 이 칙령은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해 폐기되고 위그노는 또다시 박해를 받게 된다. 이로써 30만명이 넘는 위그노들이 네덜란드와 스위스 독일 영국, 심지어는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칼뱅은 위그노들에게 끝까지 시련을 참고 견디며 절대로 폭동은 삼가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위대하신 주님께서 주신 인내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호소합니다.…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허용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을 폭동이나 반란을 위해 무장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가 전멸당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과격한 행동과 폭력은 단지 헛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 후 위그노가 정부의 인정을 받은 것은 1802년으로, 30년 전쟁이 끝나고 200년이 지난 후였다. 1907년에는 공식적인 프랑스 개혁교회로 위상을 확립했다. 위그노들이 프로테스탄트 박해사 중 가장 혹독한 시기에 보여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 정직성, 근면성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비폭력 평화운동

우리는 프랑스 위그노 수난사를 통해 칼뱅의 비폭력 평화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의 가르침이다(마 5:39, 눅 6:27∼29).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엄격한 이미지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오해한다. 그러나 실상은 칼뱅이 사랑과 관용의 사도임을 위그노 수난사를 통해 알게 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우리의 선조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비폭력으로 일관했던 것은 민족대표 33인 중 상당수의 기독교지도자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평화사상 때문이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의 인권회복을 위해 보여준 투쟁방법도 비폭력 무저항운동이었다.

우리는 위그노의 삶을 통해 순교신앙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사는 순교의 역사이다. 우리 한국교회 130년의 짧은 역사에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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