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향수, 시·노래로 열매 맺다

황해도 황주가 고향인 박화목 시인의 작품엔 실향민의 정서가 담겨있다. ‘과수원길’ 역시 고향 과수원길을 생각하며 쓴 시다. 사진은 9월의 가을 햇살을 머금고 있는 서울 태릉 과수원의 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김보연 인턴기자
 
홍제근린공원 언덕위에 세워진 ‘과수원길’ 시비. 아래는 첫 동시집 ‘초롱불’.
 
홍제근린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옛 문화촌 마을, 홍제3동 초입에 있는 문화공원과 서울 홍성교회(왼쪽부터).
 
박화목


고향은 누군가에겐 어머니이고 사랑이다. 또 누군가에겐 그리움이며 돌아가야 할 본향이다.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박화목(1924∼2005)에겐 문학의 근원이었다. 그의 작품엔 실향민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 황해도 황주가 고향인 그의 많은 시들이 향수를 노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시가 노래가 되어 실향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준 시인은 흔치 않다.

노랫말이 된 그의 시와 동요는 ‘망향’ ‘과수원길’ ‘보리밭’ 등 10여 편에 이른다. 대부분 그가 두고 온 고향을 그리고 옛 생각에 잠기며 쓴 작품들이다.

‘망향’은 사랑에 대한 그리움,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에 대한 갈증과 기다림의 노래다.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모퉁 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머언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렴아/ 그대여 내 맘 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일레라.”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한번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로 시작하는 ‘과수원길’을 불러 보았을 것이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과수원길을 걷는 듯한 아련한 어린시절의 추억에 잠기게 된다. 그가 고향 황주에 있는 과수원길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시인은 각박한 일상 속에 쫓기는 현대인들이 잠시 추억 속에서나마 옛 정서에 묻히길 바라는 마음에 ‘과수원길’을 썼다. 시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 5일 시인이 오랜 시간 머물렀던 홍제3동 옛 ‘문화촌’을 찾았다.

예술인들의 ‘문화촌’

서울 은평구 홍제3동 초입, ‘문화촌’ 마을 유래를 기록한 표지판이 서 있다. “문화촌은 1950년대 말에 홍제동 279번지 일대 홍제천변의 자갈밭을 우리나라 최초로 바둑판처럼 정리해서 반듯한 골목과 집터를 형성한 곳으로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의 지붕을 나란히 붙여서 지은 맞배지붕 형식의 양옥집 30여 채에 당시 문화예술인들이 살면서 생긴 이름이다. 초기 이 마을에는 시인 박화목 김관식 김상억씨를 비롯해 아동문학가 석용원, 화가 성기대 등의 문화예술인이 살았다.”

표지판을 지나면 양 갈래의 골목길이 나온다. 왼쪽의 가파른 언덕길을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홍제근린공원이 있다. 인왕중학교와 유원아파트 사이의 인왕산 자락에 조성된 소공원이다. 소공원 언덕길 위에 박화목 시인의 ‘과수원길’ 시비가 세워져 있다. 9월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길의 시비는 그가 피란생활 이후 정착해 살던 옛 ‘문화촌’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문화촌’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년을 살았다. 동료문인들이 불편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안타까워 집을 새로 지으라고 독촉하면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은 가지가지 추억이 얽혀 있는데 어떻게 뜯을 수 있겠나. 마당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중 측백나무는 이사 온 것을 기념해서 심은 것이고, 라일락은 아들을 낳을 때 심은 것인데 만약 집을 새로 지으려면 저 나무를 베어내야 할 것 아닌가. 저 나무엔 참새가 와서 지저귀며 놀다 가는데 그것을 베어 버리면 참새들은 어디 앉아 놀 것인가. 나는 집을 못 짓겠어.” 그는 그 집에서 찾아오는 문인들과 고향 해주와 젊은 날 떠돌던 하얼빈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고향은 돌아가야 할 ‘이상향’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보리밭)

국민가곡이 된 ‘보리밭’이 만들어진 시기는 가난하고 못 먹던 보릿고개의 시절이었다. 1951년 서울서 부산으로 피란 온 박화목은 종군기자로, 작곡가 윤용하는 해군 음악대원으로 활동하던 때였다. 당시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둘은 후세에 남길 가곡 하나를 만들기로 했다.

시인은 고향 황해도의 보리밭을 떠올리며 ‘옛 생각’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어 윤용하에게 주었고 윤용하는 3일 만에 곡을 붙여서 제목을 ‘보리밭’으로 바꾸었다. 피란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1953년에 이 곡이 초연됐는데 별 반응을 못 얻다가 1974년에야 대중에게 알려지고 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소공원에서 내려와 서울여자간호대학 인근 골목길과 홍제천변의 도로를 걸었다. 지금은 새로운 건물과 집들이 들어서 옛 문화촌의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좁다란 골목길 끝에서 낯익은 이웃들을 만날 듯했다. 시인은 아마도 잔잔한 물이 흐르는 홍제천과 인왕산 자락의 산비탈을 자주 오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홍제천변의 순환도로 밑에는 지역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이 한창이었다. 이 마을공동체는 박화목 시인 등의 문화예술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향기 나는 문화마을 만들기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동심에 묻혀 산 ‘만년 소년’

18년 전 박화목 시인을 홍제동 자택에서 만난 일이 있다. 그는 동심에 묻혀 산 만년소년의 모습이었다. 평생 어린이 사랑을 담은 주옥같은 동요 동시를 써 아동문학에 크게 기여한 박화목 시인은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유년시절을 되찾아 주고 싶어 했다.

그는 평양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삼국지 이야기와 고향인 해주 장촌리에서 제일 큰 과수원을 하는 큰아버지댁의 향수 어린 추억이 자신의 문학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이런 정서가 어우러져 1977년 ‘과수원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고향 황주지방은 북한의 대표적인 사과 명산지로 과수원이 많았다. 동구 밖 산자락마다 꽃을 피우던 과수원의 봄과 그 당시 동심의 세계를 시로 썼다. 그는 이 노래가 북녘 가족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그의 ‘문학의 항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겨우 한글을 깨우친 유치원시절 그는 교회학교 교사로부터 동시잡지를 선물로 받았다. 동요 한 편을 써서 선생님께 보여 주었다. “둥그런 햇님이 안개낀 잔등을 벌벌 기어 옵니다. 땀흘리며 옵니다…”라고 시작되는 ‘햇님’이란 동요를 보여주자 선생님은 칭찬해 주셨다. 그 때부터 책읽기와 글쓰기를 즐겨했다.

평양시내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한번 책을 들면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는 학교공부는 한번도 1등을 놓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졸업당시 수석졸업자에게 주는 총독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의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청소년문제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아동문학에 몸담았다. 그는 “예전엔 문 밖에만 나가도 병풍처럼 둘러있는 산과 드넓은 벌판, 물장난 치던 냇가, 철길 위에서 뽀옥 울리며 달리는 기차소리 등이 이젠 꿈에서나 보는 한 폭의 그림같이 느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좀 더 오랫동안 어린이의 벗으로 남아 맑고 밝은 따뜻한 동심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이북에서 피란 온 크리스천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던 영락교회에 온 가족이 다녔고 이후엔 서울 홍성교회에 출석했다.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어있는 과수원 가는 길, 황금빛 물결로 일렁이는 만추의 보리밭, 은혜처럼 쏟아지는 가을 파란 햇살, 새떼를 쫓는 초동의 목소리 …. 시인은 없지만 ‘먼 옛날의 과수원길’과 ‘만추의 들녘 보리밭’ ‘9월의 하늘’ 등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꿈의 무대로 남아있다. 시의 위력이다.

[박화목처럼 생각하기]
“어린이들의 정서적 빈곤은 산업화 산물
이럴 때일수록 동요·동시 널리 불려야”


박화목(사진) 시인은 민족의 아픔, 서정적인 자연,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동심의 세계와 타향살이에 한 맺힌 고향에 대한 향수를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일제 강점기엔 어린이에게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넣어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1998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라를 빼앗겼던 그 시절에 글 쓰는 사람들의 과제는 ‘대한의 아들’이라는 민족의식과 너희들이 장차 커서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주권의식 그리고 독립의식을 함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광복 후 근대화 시절엔 어린이들의 정서적 빈곤을 채워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어린이들에게 정서적 빈곤은 가치관을 흐리게 하고 범행의 요인을 주게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산업화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죠. 이럴 때일수록 동요, 동시가 널리 보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신학교와 만주 봉천 동북신학교를 거쳐 한신대학교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41년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 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구원과 동심의 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한국 아동문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아동문학회와 크리스천문학가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57년 첫 동시집 ‘초롱불’을 출간한 이후 ‘시인과 산양(山羊)’ ‘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 ‘꽃 이파리가 된 나비’ ‘천사와의 씨름’ ‘이 사람을 보라’ ‘순례자의 기도’ 등 모두 16권의 시집, 동시집을 출간했다.

글=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사진=이지현 선임기자·김보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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