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교회 개혁은 현재진행형… “칼뱅처럼 믿고 웨슬리처럼 전도하자”


 
네덜란드 레이든에 있는 성 베드로 교회 전경. 영국의 청교도 등을 기념하는 명판이 교회 외벽에 부착돼 있다.


장 칼뱅의 개혁 영성은 스위스에서 프랑스, 독일과 네덜란드, 폴란드 및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미국을 거쳐 마침내 한반도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바울이 탄 배가 유럽을 싣고 갔다”는 복음 파급의 비유법이 16세기 칼뱅에게서 재현된 것이다.

필자는 칼뱅의 개혁사상 진원지로 그가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를 주목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몇 명의 제자와 함께 시작한 복음의 역사가 유럽 각지로부터 제네바에 와서 훈련받은 소수의 용사들에 의해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개혁은 현재진행형이다.

프랑스와 독일로 확산된 칼뱅의 개혁운동

칼뱅은 평생 그의 조국 프랑스를 그리워했다. 그랬기에 프랑스 교회가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라며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의 자문에 성실히 임했다. 그의 개혁사상의 영향으로 시작된 프랑스 위그노(Huguenots) 운동을 위해 신앙신조와 교회정치 조례를 작성해 보내기도 했다.

프랑스는 개혁파들의 노력으로 1559년 칼뱅주의에 입각한 개혁교회 국가공의회가 설립되었으나 로마 가톨릭의 탄압으로 위그노들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를 당하는 등 오랜 환난을 겪어야 했다. 앙리 4세에 의해 1598년 낭트칙령이 선포되어 개신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루이 14세가 개신교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또다시 수난을 겪게 된다. 프랑스 개신교 수난의 중심에는 칼뱅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위그노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순교적 신앙과 삶은 이후 유럽 각국의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 독일은 칼뱅에게 특별한 영적 사연이 있는 국가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프랑스를 떠난 난민들에게 신앙공동체의 터전을 허락한 땅이며, 칼뱅 자신이 제네바에서 배척받고 3년간 목회를 한 곳도 독일령 스트라스부르였다. 그곳에서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을 만나 영적으로 깊은 교유(交遊)를 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칼뱅은 루터의 개혁운동에 깊은 연대감을 갖게 되었다. 칼뱅은 25세 연상인 루터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게 되어 ‘믿음의 아버지’라는 경의에 찬 서신을 보냈으며 루터 역시 칼뱅에게 지극한 형제의 우애를 표시했다고 한다.

한편 칼뱅은 스위스 개혁교회와 독일 루터파 교회의 연합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칼뱅주의와 장로교회 정치체제는 루터파 교회에 영향을 끼쳤으며,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개혁파 교회가 공인되고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지루한 30년 전쟁도 종식되었다. 그러나 1685년 낭트칙령이 철회되자 독일은 다시 박해받는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등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 개혁파 간의 영적 협력은 지속되었다.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칼뱅의 영성

칼뱅의 개혁주의 영성은 프랑스와 독일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네덜란드는 처음에는 독일로부터, 나중에는 스위스와 프랑스로부터 종교개혁을 받아들임으로써 개혁파 교회는 네덜란드의 국교가 됐다. 필자는 종교개혁 기간에 네덜란드에서 순교당한 개신교 신자의 수가 3세기 로마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기독교인들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을 암스테르담에서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찍이 교황권에 도전하여 최초로 영어성경을 번역한 존 위클리프(1330∼1384) 시대까지 올라가면 16세기보다 훨씬 앞선 종교개혁의 땅이었다. 칼뱅의 영국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이른바 ‘피의 메리(Bloody Mary)’로 악명 높은 메리 1세의 학정을 피해 제네바를 찾은 영국 개신교도 난민들에게 숙소를 제공했으며 1551년에는 영국 종교개혁에 깊은 관심을 담은 서신과 그의 이사야서 주석을 영국 왕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성공회) 크랜머 대주교에게는 개혁된 교회에 적합한 신조 작성을 권고하기도 했다.

칼뱅이 주도한 ‘제네바 성경’ 영역본은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기까지 영국교회와 신자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이 성경은 장(章)과 절(節)이 붙은 최초의 영어성경으로 유명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칼뱅의 영향력은 절정에 달해 ‘기독교강요’ 최종판이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그의 신학은 영국 성공회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스코틀랜드에 끼친 칼뱅의 영향은 더욱 지대하다. 여기엔 존 낙스의 헌신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칼뱅보다 네 살 위였지만 1554년 제네바 아카데미에 입학, 5년간 칼뱅의 지도를 받은 겸손한 개혁자였다.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주소서!”라고 외치며 일사각오로 복음을 위해 헌신한 존 낙스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스코틀랜드 교회와 사회는 개혁될 수 있었다. 지금 한국교회와 사회는 제2의 존 낙스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건국정신과 개혁사상의 세계화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대명사인 청교도(puritans) 영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칼뱅의 개혁사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16세기 말 영국의 국교회로부터 청교도가 분리된 근본 원인을 종교개혁의 모토로 설명하자면 ‘오직 성경’이라는 기준 때문이었다. 청교도 신앙의 전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을 말씀 속에 분명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성경은 진리의 유일한 표준이며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성경적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성경이 명하지 않은 일은 일체 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앙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 신앙은 본질상 칼뱅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국교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칼뱅주의 교회개혁을 모델로 적극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성경이 인정하는 예배의식 외에 어떤 인위적 의식도 배격했다. 이러한 청교도의 신앙은 1642년 청교도혁명 이후 20여년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 청교도들은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교회와 국가건설의 주체 세력이 되었다.

칼뱅의 개혁주의가 네덜란드를 영적으로 지배하던 당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신학운동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원래 충실한 칼뱅주의자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신학자요 성직자였다. 그는 칼뱅의 예정론 5개 조항을 반대하는 반(反)칼뱅주의자(저항파)로서, 사후에 조국 네덜란드에서 열린 도르트회의(Synod of Dort)에서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시 복권돼 네덜란드와 영국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특히 영국의 감리교 운동을 주도한 존 웨슬리에 의해 발전되었다. 웨슬리-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론’은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침례교와 오순절, 순복음 신학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신학계는 이 양대 신학이 서로 대화를 하며 공존하고 있다. 만년에 “나의 신학적 견해는 칼뱅과 머리털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고 한 웨슬리의 회고처럼, 양대 신학이 상호 협력한다면 한국교회 개혁에 큰 동력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칼뱅처럼 믿고, 웨슬리처럼 전도하자”는 슬로건으로 다시금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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