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교회 바로 세우기 위해 불후의 대작 ‘기독교강요’ 집필

프랑스 느와용의 칼뱅 생가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기독교강요’ 초판으로 1536년 출판됐다.
 
스위스 바젤의 역사박물관 전경. 중세 성당을 개조해 1894년 개관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역사박물관 중 하나다.
 
서대천 목사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은 ‘행동하는 영성가’였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당시 부패한 교황권에 맞서는 한편,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불후의 대작들을 집필했다. 루터의 ‘대교리 문답’과 칼뱅의 ‘기독교강요’ 집필이 대표적인 사례다.

개혁자들은 실천과 이론을 겸비했다.

그들에게 행동만 있고 이론이 없었다면 오늘의 개혁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이다.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이 칼뱅의 개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자는 이번 답사를 통해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쓰게 된 동기는 당시 박해받는 성도들을 변호하기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난이 칼뱅으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다

칼뱅은 쫓기는 몸으로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조용히 집필할 곳을 찾았다. 바젤이 그곳이었다. 칼뱅은 거기서 사도시대 이후 가장 뛰어난 성경 지침서로 종교 개혁사에 큰 획을 그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 1535년부터 1년간 집필했다. 칼뱅이 조국을 떠날 때 그의 친구 루이 뒤 티레가 동행했다. 바젤에 이어 제네바까지 칼뱅을 도왔지만 훗날 칼뱅이 제네바에서 추방됐을 때 티레는 제네바를 떠나 조국 프랑스로 돌아가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바울을 따르다가 끝내 세상을 사랑해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딤후 4:10) 생각이 났다. 게다가 칼뱅은 길 안내자에게 소지품도 강탈당해 극심한 빈곤 상태에서 글을 써야 했다.

필자는 당시 기독교강요 초판을 찍어낸 출판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지금은 출판소 형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어떤 표시나 소개도 없었다. 주소를 들고 현지인들에게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바젤 역사박물관에서 재차 확인했지만 똑같은 장소만 알려줬다. 칼뱅에게 집필 장소를 제공했다는 카타리나 클라인의 집도 수소문 했으나 허사였다.

극한의 가난과 고통 속에서 기독교강요를 쓴 젊은 개혁자 칼뱅. 그것도 자신의 신분, 이름을 숨겨야만 했던 불안한 나날 속에서 성경을 붙잡고 종교개혁의 영성을 발견하려 몸부림친 칼뱅의 심정을 그려보았다. 그를 움직인 힘은 무엇일까. 그의 도피 경로를 따르면서 필자는 칼뱅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성경의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집필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너지는 중세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성경 연구와 집필을 염원한 칼뱅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은 카타리나 클라인이라는 여성 독지가를 통해 글 쓸 장소를 제공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옷감 상인이었던 루디아를 예비하셔서 바울로 하여금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하신 사연(행 16:11∼15)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한 여인의 봉사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기초가 된 성경교리를 탄생시켰다. 칼뱅의 행동이 영적 전투였다면 집필은 영적 전략이었던 것이다.

박해받는 성도들 위해 쓴 ‘기독교강요’

많은 학자들은 기독교강요를 칼뱅의 조직신학이라고도 하고 성경교리서라고도 한다. 물론 이런 평가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뱅이 이 책을 쓰게 된 궁극적인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이 책은 당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박해 받는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기독교강요 초판을 집필한 바젤과 증보판을 집필한 스트라스부르를 답사하면서 이를 확인했다. 이는 초판 서문과 그의 시편 주석서 서문에서 발견한 내용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칼뱅은 그의 시편 주석서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내가 바젤에 숨어있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성도들이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이 화형의 소식이 외국에도 알려지자 당국은 무고히 피를 흘린 순교자들을 이단으로 선동하며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것으로 중상과 비난을 하고 있는데 만약 내가 모든 능력을 다해 그들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나의 침묵은 비겁한 것이고 배반자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강요’를 집필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칼뱅은 이 책을 당시 기독교 박해의 장본인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면서 학정(虐政)을 멈출 것을 강력히 촉구했던 것이다.

기독교강요가 완성된 지 24년 후인 1560년부터 칼뱅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프로테스탄트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과 후에 위그노만큼 혹독한 박해 속에서 순교한 신앙공동체는 유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칼뱅은 조국에서 박해 받는 신앙 동지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자주 위로의 글을 보냈다. 가령 어떤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절대로 폭력은 삼가라는 권면 등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칼뱅은 고난 받는 성도의 신앙 수호를 위해 그리스도 변호론이자 개혁주의 영성의 교범으로 기독교강요를 쓴 것이다.

이 책은 유럽 전체를 놀라게 했으며 무엇보다 로마 가톨릭을 충격에 빠뜨렸다. 로마 가톨릭 당국은 기독교강요를 이단의 ‘꾸란’이자 ‘탈무드’라고 규정하고 출판된 책을 수거해 불태우기에 급급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가장 성경적인 교리서가 나왔다고 극찬했으며 마르틴 부처는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가장 풍성하게 축복하시기 위해 칼뱅을 거룩한 도구로 택하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기독교강요는 기독교 불후의 명저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문장으로 세계문학의 고전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하나님을 바로 전하려 일생을 바쳐 쓴 ‘기독교강요’

칼뱅은 말라리아의 일종인 사일열(四日熱)에 걸려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붓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 가시기 전에 개정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는 총 6장의 작은 소책자였던 초판을 계속 보완했고, 1559년 총 80장의 방대한 최종판을 완성하기까지 무려 23년간 혼신을 다했다.

19세기 교회사가이자 선구적 에큐메니컬 운동가였던 필립 샤프는 기독교강요에 대해 “이 책은 복음주의 신앙을 변증하고 있으며 당시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영감을 받아 쓴 책”이라고 평가했다. 성경이 사제들의 전유물로 취급됐던 오랜 영적 암흑기를 거부하고 만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려진 그 감격의 새 시대를 상상해 보면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쓰게 된 위의 동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칼뱅의 개혁주의 영성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바젤에서, 그가 흘린 눈물과 땀과 기도의 흔적 속에서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종의 멍에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에 한국교회는 칼뱅이 기독교강요 제1장에서 강조한 “하나님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힘 있게 전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말할 때(행 7:55∼56) 교회개혁을 통한 사회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글·사진=서대천 목사(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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