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진정한 개혁 위해 말씀으로 무장된 순교적 목회자 양성”

제네바 아카데미 전경으로 칼뱅이 1559년 설립했다.
 
제네바 아카데미 현관 위 종석(宗石)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잠언 9장 10절 말씀이 새겨져있다(왼쪽). 칼뱅의 무덤은 그의 요청에 따라 아무런 표식이 없다. 다만 화란 출신 신학생이 칼뱅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곳에 칼뱅의 이니셜이 새겨진 돌을 남겨 두어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오른쪽).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필자가 이번 답사를 통해 관심을 가진 것은 칼뱅의 개혁운동에서 그의 교육사상과 그 실천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칼뱅의 종교개혁에 있어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제네바에 학교를 세워 복음전도자 양성에 힘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헌신은 지금도 각 분야에 수많은 인재 배출로 열매를 맺고 있다.

유럽 명문이 된 제네바 아카데미

칼뱅은 평소 진정한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훌륭한 복음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앙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는 개혁운동이 가톨릭교회로부터 거센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으로 무장된 순교적 목회자 양성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기독교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칼뱅이 1559년에 설립한 제네바아카데미는 그런 시대적 요구의 결과였다. 칼뱅의 기독교 교육에 대한 구상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해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를 했던 1538년부터 시작됐으며, 1541년 재청빙을 받은 후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1559년 6월 5일 제네바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구체화됐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시절, 그곳에 세워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네바에 이상적인 기독교학교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칼뱅이 이처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학교에서 다양한 학문을 깨우친 왕성한 학구열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예비 성직자들과 귀족의 자제 등 특수 계층에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던 중세 암흑기 상황을 감안하면 칼뱅이 어려서부터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요 인도하심이었다.

필자는 초창기의 제네바아카데미와 지금의 제네바대학교를 답사하면서 개교 당시의 교육자 칼뱅을 회상해 봤다. 특히 초대 학장에 후계자인 베즈를 지명해 세웠다는 사실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학교의 설립자로서 당대 최고의 석학인 칼뱅이 당연히 학장을 맡아야 했지만 제자에게 수장의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칼뱅은 개교식에서 사회만 보았으며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평교수를 자임했다. 그의 인품은 제네바 공동묘지 프랑 팔레에 이름 없이 묻힌 검소한 무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칼뱅의 교육은 이내 큰 성과를 거두어 개교 5년 만에 대학 준비과정인 ‘스콜라 프리바타’에 1000명이 넘는 학생이 입학해 공부했으며 대학 과정인 ‘스콜라 푸블리카’에서는 300명이 공부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네바아카데미는 제네바 시민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 등 인근 국가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와 짧은 시간에 국제적인 프로테스탄트 학교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생 중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존 낙스(John Knox)도 있었는데, 그는 칼뱅에게서 배우고 돌아가 조국의 교회를 개혁하게 된다. 초기에는 신학을 중심으로 교육하다가 1872년 의학부가 설치되면서 현대적 종합대학으로 발전했다. 교수진도 초기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찾아왔는데 그 중에는 카트라이트와 위텐보가르트 등 당대의 석학들도 있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선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개교 초기부터 유럽 전역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왔을 뿐 아니라 450년을 훌쩍 넘어선 오늘날까지도 세계적 기독교 명문으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제네바아카데미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필자는 제네바아카데미 현관 위 종석(宗石)에 새겨진 잠언 9장 10절의 요약에 마음이 끌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바탕 위에 학문의 집을 세우고자 한 칼뱅의 교육 사상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원로교육자인 손봉호 박사는 최근 ‘종교개혁과 인간교육’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개혁이 인류 역사에 공헌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민주주의, 기본인권 사상, 자본주의, 현대과학 등 현대문명의 근간이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현대교육이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시행하고 있는 의무교육제도는 사실상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시작됐다.”

칼뱅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는 시민이 의무적으로 교육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칼뱅의 교육사상은 당시 소수 귀족에게만 교육의 기회를 준 가톨릭의 제도를 거부한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루터와 멜랑히톤도 칼뱅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교황권에 의해 사제들에게만 제한된 성경이 만인에게 읽혀지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개혁자들은 모든 아동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뱅이 건강을 해칠 정도로 바쁜 사역 중에도 거의 매일 성도들과 시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던 것도 바로 이런 성경적인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칼뱅은 조국 프랑스에서 박해받는 위그노와 개혁교회를 위한 신학교를 제네바에 세워 지원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개혁, 성경적인 인성교육으로부터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종교개혁 이전의 교육으로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성경적인 참 인간교육이 아니라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을 얻고 세상적인 힘을 획득하기 위한 전문 직업교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조차 이런 풍조에 휩쓸리고 있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어긋날 뿐더러 자녀들과 우리 사회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손 박사는 “종교개혁을 제대로 기념하려면 교육이 직업이나 얻고 경쟁에서 이길 힘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영화롭게 하며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그 위대한 전통을 다시 살려 한국 교육을 성경적인 인간 교육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필자는 이 점에 철저히 동의한다.

한국교회 초기 역사를 살펴볼 때 130년 전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전도의 방법 또한 칼뱅의 모델과 일맥상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아침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디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회개척과 동시에 학교를 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보다 학교를 먼저 세웠다.

당시 선교사들은 조선 조정(朝廷)의 전도활동 금지령에 따라 우선 학교와 병원을 통한 선교를 시작했다. 공식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 해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 알렌에 의해 1885년 2월 29일 의료기관으로 광혜원(廣惠院)이 먼저 세워졌으며, 6개월 후인 1885년 8월 3일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세워진다. 2년 뒤인 1857년 9월 27일엔 언더우드 사랑채에서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다.

이처럼 한국교회 성장의 뿌리에는 칼뱅이 보여준 제네바 모델의 기독교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는 기독교 교육기관을 성경 위에 다시금 굳건히 세워야 하는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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