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하나님 절대 주권이 지배하는 교회와 국가 꿈꿨다

생 피에르 교회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들렌느 교회로 칼뱅이 주중 설교와 신앙교육을 행했던 장소이다. 생 피에르 교회 내부에 전시되고 있는 칼뱅의 의자로, 병약해진 칼뱅이 서서 설교할 수 없어 앉아서 설교했다.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준 파렐 모습(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칼뱅


칼뱅은 1541년 스트라스부르 사역을 마감하고 3년 만에 제네바로 귀환하게 된다. 칼뱅에게는 수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 제네바의 사정은 더 나빠져 교회는 개혁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사회질서가 무너져 걷잡을 수 없는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교회와 시의회는 하나님이 쓰시는 영적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됐다. 칼뱅이 기도해온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지배하는 교회와 국가를 실현할 때가 온 것이다.

칼뱅의 제네바 귀환과 수많은 난제들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종신토록 교회를 치리해 달라는 간절한 청빙을 받은 32세의 젊은 목회자는 제네바의 수많은 난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칼뱅이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우리는 그의 주석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그의 주석서에 담긴 수많은 기도문의 내력을 제네바 답사로 알게 됐다. 칼뱅은 바쁜 사역 중에도 생 피에르 교회에서 매주 정한 시간에 어김없이 성경 강론을 했으며 제네바 개혁 전 기간을 통해 지속했다고 한다. 그때 작성한 교안이 모여 오늘의 방대한 ‘칼뱅 주석서’가 됐는데 그 속에 그의 수많은 기도가 수록된 것이다.

이는 칼뱅이 제네바를 통한 교회개혁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위해 얼마나 기도의 성전(聖戰)을 벌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칼뱅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증명하듯 생 피에르 교회 안에는 병약해진 칼뱅이 더 이상 서서 설교할 수 없어 앉아서 설교했던 당시의 칼뱅 의자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병상 중에서도 끝까지 말씀을 놓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외쳤을 그 음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1564년 55세를 일기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제네바에서 23년을 성경공부와 기도로 일관했다. 개신교 최초의 성경교리서인 ‘기독교강요’ 초판을 완성한 153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칼뱅은 일생을 ‘오직 성경으로’, 성경의 중심이신 ‘오직 그리스도로’ 교회개혁에 매진한 것이다.

칼뱅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헌법과 예배 의식을 새롭게 도입하는 등 건강을 돌볼 겨를도 없이 불철주야 교회개혁에 진력하는 한편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 복음 사역자 양성에 힘썼다. 제네바의 영적 분위기도 일신되어 갔다.

칼뱅의 교회개혁을 통한 국가 변혁의 이상

무엇보다도 칼뱅이 제네바에서 실천한 중요한 일은 교회제도의 개혁이었다. 동시에 교회를 통한 사회개혁이었다. 칼뱅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만이 다스리는 교회와 국가’를 추구했으며 그것을 제네바를 중심으로 실현하고자 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사역 기간에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집필했는데, 자신의 교회제도 및 성례에 대한 구상과 교회를 통한 사회개혁을 그 책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교회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논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즉 교회의 개혁은 교회 자체를 위한 것이지만, 교회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개혁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칼뱅은 교회와 국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제네바를 성경적 공화국으로 만들려 했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칼뱅의 ‘신정정치(神政政治)’ 이상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의 신정정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유의할 것은 칼뱅은 결코 교회와 국가가 혼합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듯이 세속 정부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지만 영적 교회와 육적 국가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칼뱅이 제네바 교회의 지도자로 재청빙 받은 후 23년간 한 번도 교회를 떠나 정치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세속 정부와 권력을 인정했지만(롬 13:1∼2) 근본적으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교회와 국가의 절대 주권자라 여겼다. 만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교회와 국가를 실현하려한 점에서 칼뱅의 이상은 신정정치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제네바는 인구가 2만여명이었고, 대다수 시민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도 그의 개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제네바 행정 지도자들도 국가에 충성하는 동시에 교회에 충실하겠다는 서약을 했으며, 모든 시민은 투표로 국가법과 함께 교회법의 치리를 성실히 따를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제도는 당시 제네바뿐 아니라 취리히와 바젤, 로잔 등 스위스 개혁도시의 대다수 목회자들이 채택한 제도였으므로 신정정치를 유독 칼뱅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그의 엄격한 개혁운동이 시민의 저항을 가져왔다고 해서 이런 평가를 내린다면 칼뱅을 제네바의 정치적 독재자로 오해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이상은 리처드 니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교회개혁을 통한 사회변혁이었다.

칼뱅의 개혁사상을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필자는 칼뱅의 이런 이상을 ‘제네바 성시화(聖市化)의 꿈’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어쩌면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의 도성’에서 보여주듯 세속 도성으로부터 하늘의 도성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이상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국가의 하나였던 제네바가 오늘날 유엔의 주요 기구를 비롯해 국제적인 주요 기관과 NGO들이 집중해 있는 세계평화의 중재 지역이 됐다는 사실도 칼뱅의 이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오늘날 심각한 세속화시대에 스위스가 상대적으로 도덕적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故) 김준곤 목사가 1960년대 민족복음화운동에 이어 시작한 세계성시화운동은 칼뱅의 제네바 개혁을 모델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칼뱅이 제네바 정치의 수장(首長)이 되어 직접 행정에 관여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현장에 와서 알았다. 당시 제네바를 비롯한 대다수 도시에는 교회와 국가, 교회정치와 국가정치가 혼재돼 있었다. 이런 가운데 칼뱅은 교회를 통한 국가의 변화를 추구했다.

최근 국민일보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의 통합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을 본받아 진정한 섬김의 리더십을 갖는 것이다. 제네바 교회 개혁을 위해 파렐과 칼뱅이 보여준 섬김이 그 모델이 될 것이다.

프랑스가 조국인 파렐은 칼뱅보다 20세 연상으로, 제네바에서 먼저 교회를 개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젊고 유능한 칼뱅을 제네바의 영적 지도자로 세웠다. 칼뱅이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할 때 파렐도 함께 추방됐다. 그런데 제네바 교회와 시의회는 3년 만에 칼뱅만 다시 초빙한다. 제네바로 돌아갈 수 없게 된 파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그는 칼뱅의 귀환을 적극 도왔다. 지금 한국교회는 파렐이 보여준 동역자 간의 ‘섬김의 리더십’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갈라진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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