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제 심장을 주님께 바칩니다” 개혁에 목숨 건 칼뱅

칼뱅 후예들의 예배처소였던 부클리에 교회 옆 칼뱅이 거주했던 집. 지금은 교회 참사회 소속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칼뱅이 처음 장소를 빌려 목회했던 위그노 교회인 생 니콜라 교회 전경.
 
제네바의 생 피에르 성당. 이곳에서 칼뱅은 성경 교사를 시작해 얼마 후 목회자로 사역하게 된다.
 
칼뱅의 순종을 나타내는 문장(紋章)으로 "주님께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 바로, 그리고 신실하게!"라고 새겨져 있다. 칼뱅이 파렐에게 보낸 편지 글귀이기도 하다.
 
서대천 목사


1536년 7월 어느 날, 한 청년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다. 2년 전 교황의 체포령을 피해 창문을 빠져나와 지붕을 타고 파리를 탈출한 장 칼뱅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바울이 유대인의 추적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탈출한(행 9:23∼25) 사건에 비견하기도 한다. 그는 프랑스 접경 지역인 스트라스부르(당시 독일령)를 거쳐 바젤에서 1년 간 ‘기독교강요’를 집필한 후 제네바를 찾았다. 때는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직후였다.

박해받는 자를 위로하고 함께 한 칼뱅

필자는 칼뱅의 생가와 학업의 현장 답사를 마치고, 종교개혁기에 피로 얼룩진 위그노(Huguenot)의 순교 현장을 확인한 후 그들의 피난처이자 칼뱅의 사역지였던 스트라스부르를 찾았다. 이곳은 당시 ‘추방당한 형제들의 안식처’로, 후일 ‘종교개혁의 안디옥’이라 불린 곳이다. 칼뱅에게는 특별한 인연의 땅이다. 칼뱅은 1534년, 쫓기는 몸으로 프랑스 종교 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며칠간 이곳에 들렀다. 그리고 4년 뒤인 1538년 제네바에서 일시 추방당했을 때에도 3년간 이곳에 머물며 목회를 했다.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 지방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지리적으로 당시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교의 박해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가까운 국경지대였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뱅이 첫 설교를 했던 생니콜라 교회와 칼뱅 후예들의 예배처인 부클리에 교회를 찾았다. ‘가난했으나 가장 행복한 목회시절’을 보냈다는 칼뱅을 그려보았다. “제가 제네바에 두고 온 책을 팔면 다음 겨울까지는 집세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후에는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라며 파렐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생각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제네바 시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생활비조차 받지 못한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칼뱅은 오히려 피난 성도들의 생활을 걱정하며 미래를 오직 하나님께 맡겼다. 특히 스트라스부르에 먼저 도착해 목회를 하고 있던 마르틴 부처가 칼뱅이 방문할 때마다 환대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복음을 위한 동역자 간의 섬김이 얼마나 아름답고 중요한지를 배웠다. 하나님은 칼뱅이 가는 곳마다 예비해 두신 동역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큰일을 이루어 가셨다. 바울을 위해 바나바를 예비하신(행 9:27) 하나님께서는 칼뱅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에는 부처를, 제네바에는 파렐을 예비하신 것이다.

제네바는 당시 부패한 가톨릭교회로부터 막 벗어나 새롭게 개혁된 교회를 꿈꾸는 시민들의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 중요한 시점에 칼뱅이 제네바를 방문한 것이다. 원래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기 위해 가려 했으나 전쟁이 길을 막아 예정에 없던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제네바 교회지도자 파렐은 즉시 칼뱅을 만나게 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확신하고 그에게 제네바를 위해 헌신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칼뱅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계속 사양하자 파렐은 마침내 “만일 자신의 일을 그리스도보다 앞세운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순간 영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칼뱅은 파렐의 요청에 순종해 제네바 교회 개혁에 참여하게 된다. 후일 칼뱅은 “마치 하나님의 손이 내 머리 위해 펼쳐지는 것 같았다”고 이 때를 회상했다.

필자는 제네바 시내의 ‘종교개혁자의 동상’에 나란히 부조(浮彫)되어 있는 칼뱅과 파렐을 바라보며 그날의 순간을 상상했다. 후일 칼뱅의 후계자가 된 베즈와, 스코틀랜드로부터 제네바까지 달려와 칼뱅의 영성을 배워 조국을 변화시킨 존 녹스가 함께 새겨진 자리에 하나님은 이 시대의 개혁자로 누구를 세우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나님의 예정론적 섭리에 순종한 칼뱅

필자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예정론적인 섭리에 순종하는 칼뱅의 겸손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날 밤의 결단이 인간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영적인 무방비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응답한 젊은 전도자를 통해 그 옛날 모리아 산에서의 ‘준비하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종’ 아브라함의 모습(창 22:1∼14)을 보는 것 같았다.

1950년대 초 김용기 장로님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를 개척하고 농촌목회에 일생을 바친 필자의 선친께서는 생전에 두 가지를 교훈하셨다. “주의 종은 하나님이 떠나라면 지체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과, “어디든지 오라 하면 형편을 묻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요 실천이다. 칼뱅은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필자를 비롯한 주의 종들은 교회에서 주인 행세하며, 젊은 전도자들은 교회 청빙에 사례비부터 따지는 슬픈 세태가 되어 버렸다. 칼뱅이 보여준 순종의 발자취를 밟으면서 절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 순종한 칼뱅은 1536년 7월부터 1538년 부활주일까지 2년 가까이 제네바 교회개혁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했다. 그러나 그의 신정정치 이상과 엄격한 규율에 저항하는 시민들에 의해 파렐과 함께 제네바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그가 추방당하기 전 마지막 부활절 예배를 인도한 생피에르성당을 답사하면서 필자는 그 날 칼뱅이 전한 설교의 내용이 자못 궁금해졌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성찬식도 베풀지 못한 데다가 심지어 칼로 위협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제네바를 떠나기 전에 칼뱅이 남긴 글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갈 1:10; 살전 2:4)”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피에르성당에서 듣게 된 영음(靈音)이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에게서 분명 배반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시게 한 일이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합당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역사가 필립 샤프가 스위스 종교개혁사에서 인용한 칼뱅의 결의에 찬 음성이었다.

필자는 칼뱅의 제네바 사역의 발자취를 통해 그가 보여준 순종의 리더십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칼뱅은 제네바가 자신을 배척하자 지체 없이 떠난다. 이어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만 3년 동안 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목회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제네바로부터 재청빙을 받는다. 칼뱅이 떠난 후 제네바는 이전보다 더 큰 영적 혼란에 빠졌고, 칼뱅의 개혁적 리더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배척한 제네바를 위해 늘 기도해온 칼뱅은 이를 하나님 뜻으로 알고 즉각 순종하게 된다.

1541년 9월 13일, 제네바로 귀환한 칼뱅은 5년 전 자신을 붙잡았던 파렐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의 심장을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롬 12:1)로 바치기 위해 심장(heart)을 손에 든 ‘순종의 칼뱅 문장(紋章)’은 이때 만들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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