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나는 당신의 종’ 고백한 칼뱅, 말씀 붙들고 개혁의 광야로

장 칼뱅이 1509년 7월 10일 태어나 수개월간 살았던 장소로 지금은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칼뱅이 12세 전후에 다녔던 귀족 자제를 위한 학교인 콜레주 드 카페트 전경.
 
칼뱅이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욱스캉 수도원 전경.
 
칼뱅 박물관에 전시된 칼뱅의 친필 사인. 번역하면 ‘나는 당신의 작은 종입니다’로 해석된다.


봄이 오면 온 산천에 꽃이 피듯, 독일의 한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16세기 종교개혁의 바람은 울타리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하자 부패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운동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시작해 칼뱅이 확산시켰다는 교회사의 평가처럼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칼뱅의 개혁운동은 그의 조국 프랑스로, 네덜란드와 독일 스코틀랜드 영국 등지로 확산됐고 미국을 거쳐 마침내 한반도로 상륙한다.

장 칼뱅의 고향 느와용을 찾아서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한 필자는 북부의 피카르디 지방으로 향했다. 칼뱅이 출생한 느와용(Noyon)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현지에서는 위그노 연구의 권위자인 권현익 선교사가 동행했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국경과 접하고 있어 일찍이 외부로부터 문물과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배출된 역사적인 땅에서 칼뱅이 태어난 것은 태초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칼뱅이 1509년 7월 10일 태어나 생후 수개월간 살았다는 생가였다. 지금은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칼뱅의 주석과 ‘기독교강요’,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비롯해 다양한 그의 저술을 보관하고 있어 칼뱅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그의 친필 사인이었다.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겸손한 종을 쓰신다. 진정 하나님을 만난 자만이 자신을 작은 종이며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칼뱅은 임종 시에도 동역자들에게 성경으로 교회를 돌볼 것을 부탁했으며, 마지막까지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았다. 그런 칼뱅 앞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쥐고 있는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가’를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진정한 개혁은 성경을 떠나버린 교회를 말씀으로 복귀시키는 것이건만,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 위에 굳건히 서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칼뱅은 주님 앞에 서는 순간까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었다.

칼뱅이 어려서 다닌 학교를 확인하다

칼뱅의 고장인 피카르디는 종교개혁을 위해 예비된 땅이었다. 루터에게도 영향을 끼친 쟈크 르페브르와 제라르 루셀 등 당시 종교개혁자 중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유서 깊은 느와용은 도시의 규모는 작았지만 참사원의 숫자가 파리 노트르담보다도 많았던 곳으로, 반가톨릭 개혁가들이 일어난 저항의 땅이기도 했다.

칼뱅은 조상 대대로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은 느와용 주교의 비서이자 성당의 재무관리를 하는 로테즈(회계사)로, 시청 건축에도 깊이 관여할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저항적인 사상을 지녔다고 한다. 어머니 쟌느 르프랑은 경건한 신앙심을 지닌 미모의 여성으로 칼뱅이 다섯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어린 칼뱅을 데리고 인근 지역의 욱스캉(ourscamps) 수도원을 찾아 성모 마리아의 모친인 안느의 유골을 참배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만일 칼뱅이 어려서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면 분명히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은 컸겠지만 칼뱅을 장차 교회개혁의 지도자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일찍부터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칼뱅의 어린 시절, 초급 과정 콜레주(학당)인 콜레주 드 카페트를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시기는 1523년 칼뱅이 파리의 콜레주 드 라 마르쉬와 콜레주 드 몽테규에서 공부하기 전으로 그의 나이 12세(1521)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귀족 자제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미래의 종교개혁자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칼뱅이 교육을 중시해 훗날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운 것도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으로 탁월한 학자의 자질을 갖춘 데서 연유한다.

파리에서 공부하며 개혁사상을 갖다

칼뱅은 종교개혁자 중 공부를 많이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파리로 유학해 두 곳의 콜레주에서 공부했으며, 오를레앙대와 부르쥬대, 그리고 파리 포르테대 등에서 계속 공부하게 된다. 그는 학창 시절에 강의할 만큼 출중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교사로 알려진 멜키오 볼마르에게서 헬라어와 헬라어 성경강독을 배웠고, 권위 있는 법률가 오를레앙 데스투알에게서 법학을 배워 약관의 나이에 수사학과 법학, 인문학과 신학에 정통했으며 22세의 나이로 법학 박사가 되었다. 특히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 파리 왕립학교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히브리어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칼뱅의 학업 과정을 유의해서 보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위하여(법학)’,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위하여(인문학)’,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위하여(성경)’로 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칼뱅에게 종교개혁을 위한 거친 광야의 시간이 찾아왔다. 1532년에 쓴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이 파문을 일으켰고, 이듬해 절친인 니콜라 콥을 위해 대필한 총장 취임 연설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체포 직전 파리를 탈출하게 된다. 평소 가톨릭 교리에 회의를 품었던 칼뱅은 1528년 회심을 경험했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하나님이 변화를 주셨다. 그분은 나로 순종하게 하셨다”라고 고백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대대로 믿어온 로마가톨릭과 1532년 절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주의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칼뱅은 12세 때부터 받아온 성직록을 반환했으며 아버지가 바라던 사제직을 포기하고 1536년 제네바에서 프로테스탄트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후일 칼뱅은 이때의 심경을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다윗이 목동의 신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지위로 높여졌듯이,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비천한 나를 택하사 복음의 설교자이자 목회자라는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셨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인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오늘의 교회개혁이 다음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에 중·고등부 학생회를 두지 못한 교회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심각한 세속화시대에 자녀들을 세상에 빼앗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과연 개미허리가 된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개혁은 가능할까. 여기에 다음세대 교육의 중요성이 있다. 자녀는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키우신다. 곧 교회가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자녀는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기업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기업을 바로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글·사진 서대천 목사 (홀리씨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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