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시대의 어둠에서 ‘민중’을 싹 틔우다

소설가 박화성은 60여년의 작가생활을 통해 기독교 정신이 담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전남 목포시 목포근대문화역사관 1관 뒤편 일제가 폭격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방공호 속에서 자라고 있는 풀잎의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목포문학관 앞에 세워진 박화성의 흉상과 시비.
 
정명여학교 내에 있는 옛 선교사주택.
 
박화성 작가가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생활 했던 양동교회.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목포근대문화역사관 1관 전경.
 
박화성 초상화와 장편소설 ‘백화’의 표지.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공호 속에서 자란 풀잎은 가난과 굴욕에 가슴을 옥죄던 조선인들이 꾸었던 ‘한 뼘의 꿈’이었을까. 전남 목포시 영산로 목포근대문화역사관 1관(옛 일본영사관) 뒤편, 태평양전쟁 시 폭격을 차단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방공호에서 마주한 풀잎은 소설가 박화성(1903∼1988)이 말하는 ‘민중’을 상징하는 듯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소설가 박화성은 시대의 아픔을 작품의 살과 뼈로 삼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했다. 특히 식민지 시대의 가난하고 핍박받는 도시빈민과 농민의 현장을 형상화해 리얼리즘 문학을 개척했다.

그는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단편소설 ‘추석전야’를 ‘조선문단’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30년 넘게 목포에 거주하면서 50년대 목포문학의 꽃을 피우게 한 주역이었다. 그는 목포 해남 무안 신안 나주 함평 등을 배경으로 일제 식민지 삶의 모순을 취재해 소설로 썼으며 ‘하수도 공사’ ‘홍수전후’ ‘백화’ 등의 작품을 통해 농민과 노동자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했다. 그는 인물과 상황을 세밀한 공간묘사로 생생하게 재현했다.

눈물의 항구, 목포

목포는 서해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해서 목포로 불렸다. 조선 세종 때는 만호진이 설치돼 수군이 주둔했다.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자 항구는 일본 선박이 밀려들었다. 쌀, 면화 등 미곡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목포는 골목골목 우리 민족의 설움이 깊이 서려 있다. 목포는 그 어두운 현실 속에서 광복을 꿈꾸며 꿋꿋하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재했던 곳이다. 지난 17일 박화성의 작품 속 공간 목포를 찾았다.

목포국제여객선터미널 4층에 올라가면 유달산과 산 중턱까지 빼곡한 가옥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반듯하게 포장된 도로와 근대 건축물이 자리한 남촌(유달동)엔 과거 일본인들이 거주했고, 일본인에게 밀려 유달산 북쪽으로 쫓겨난 조선인들은 낙후된 북촌(북교동, 죽교동)에 모여 살았다. 북촌엔 ‘추석전야’의 영신, ‘하수도 공사’의 동권과 용희 등과 같은 가난한 군상이 존재했을 것이다.

“목포의 낯은 참 보기에 애처롭다. 남쪽으로 늘비한 일인의 기와집이오. 중앙으로는 초가에 부자들의 옛 기와집이 섞여 있고 동북으로는 수림 중에 서양인의 집과 남녀학교와 예배당이 솟아 있는 외에 몇 개의 집을 내놓고는 땅에 붙은 초가집이다. 다시 건너편 유달산 밑을 보자 집은 돌 틈에 구멍만 빤히 뚫어진 돼지 막 같은 초막들이 산을 덮어 완전한 빈민굴이다. 그러나 차별이 심한 이 도회를 안고 있는 자연의 풍경은 극히 아름답다.”(‘추석전야’ 중에서)

여객선터미널에서 왼편으로 걸으면 선창가가 이어진다. ‘추석전야’의 주인공 영신이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기름 냄새와 면화 먼지 속에서 일했던 영신이 퇴근 후 탁 트인 해안을 바라보며 한숨 돌렸을 것이다.

“방적공장의 오후 6시 기적(奇籍)이 ‘뛰이’ 하고 울자 벤또 싼 흰 보(褓)를 옆에 낀 여공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오전 7시부터 종일 기계와 싸움하기에 고달픈 그들의 연약한 몸들이 이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목포의 석양은 면화 가루에 붉어진 그들의 눈을 위로해 주며 해안의 양풍은 땀에 절은 그들의 얼굴을 곱게 씻어 준다.”(‘추석전야’ 중에서)

‘추석전야’와 ‘하수도 공사’

‘추석전야’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착취당하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과 분노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인공 영신은 초막과 같은 빈민굴에서 살고 있는 방적공장 여공이다. 소설은 방적공장의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일본인 공장 감독이 어린 여공을 희롱하는 데 분개해 항의하다가 기계의 북이 튀어나와 어깨에 부상을 당하게 된 영신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민은 사흘 앞으로 다가온 추석이다. 남편 없이 가족을 부양하는 영신의 수중엔 돈이 없다. 영신은 어깨 상처에도 불구하고 밤새 삯바느질해 번 돈과 공장에서 받은 십일급을 합해 추석을 지내려 한다. 그러나 인색한 땅주인 영감이 찾아와 밀린 땅세를 모두 받아가 수포로 돌아간 비정한 현실에 영신은 땅주인이 두고 간 잔돈 은화 오십 전을 땅바닥에 버리며 돈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한다. 추석전야 마지막 문장에 박화성 특유의 미학이 느껴진다. “내버린 은전은 마당에서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목포근대역사관 2관(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부근은 지금도 일본식 가옥이 많이 남아있다. 일부는 카페로 리모델링해 영업 중이다. 역사관에서 나와 유달산을 향해 서면 언덕길 옆으로 붉은 벽돌로 지어진 목포근대역사관 1관이 눈에 들어온다. 옛 일본영사관 건물이다. 목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건물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목포 개항 후 일제가 영사 업무를 보기 위해 1900년 설립한 행정 관청으로 광복 후엔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단편소설 ‘하수도 공사’의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 속에서 노동자들이 몰려와 파업을 선언한 목포부청이 옛 일본영사관이다.

밀린 석 달 치 임금을 받기 위해 유달산의 하수도 공사에 참여했던 노동자 300여명이 경찰서로 몰려간다. 목포부청과 하수도 공사를 계약한 중정이라는 자가 공사금액 4할을 떼먹고 공사를 진행하며 밀린 임금을 주지 않으니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 요구한다. 시위는 정이라는 사상가로부터 지도를 받은 동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지금의 초원호텔 자리에 당시 경찰서가 있었다.

‘하수도 공사’는 1932년 5월 ‘동광’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1931년 3월 29일 일어난 목포의 하수도 공사장 소동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빈민구제 사업의 하나로 하수도 공사 사업을 벌였으나 결국 청부업자와 자본주의 지주에게만 이익이 돌아갔다.

“십일월 하순 만 일 년 만에 하수도 공사는 완전히 끝을 마치었다. 뒷개에서부터 보통학교 뒤로 김장자의 대궐 같은 뒷담을 감돌아 유달산록의 허리띠와 같이 목포의 하수도는 굉장했다. 최후까지 일을 계속한 200명의 노동자들이 흩어질 때는 그립던 처자를 만난다는 기쁨보다도 눈 날리고 꽃 피며 푸른 그늘 가을 달이 번갈아 가고 오는 일 년 동안 공동의 이해에서 같이 일하고 함께 싸우며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의 우정을 떼이기를 더 어려워하였다.”(‘하수도 공사’ 중에서)

하수도 공사는 유달산을 둘러서 죽교동 뒷개에서 북교초등학교 청년회관을 거쳐 불종대, 수문통거리를 지나 아리랑고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길 어디엔가 ‘하수도 공사’의 주인공 동권과 용희가 살던 집이 있을 것 같았다.

양동교회와 선교사 주택, 목포문학관

목포시 죽동에서 태어난 작가는 부모를 따라 양동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양동교회는 1897년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 선교사가 세운 목포 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나른 석재를 주재료로 축조했고 왼쪽 출입문 위쪽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교회 인근 삼일로엔 작가가 다닌 정명여중과 구 선교사 사택이 있다. 화강암으로 지어진 사택은 현재 정명여고의 100주년 기념관과 음악실로 사용되고 있다.

또 박화성 차범석 김우진 김현 등 목포문인들의 상설전시관이 있는 목포문학관은 확 트인 바다가 보이는 갓바위문화타운 인근에 있다. ‘면화 가루에 붉어진 방적공장 여공들의 눈을 위로해 준 목포의 석양과 땀에 전 얼굴을 곱게 씻어 준 해풍’이 느껴지는 장소이다.

문학관을 떠나올 때 작가의 육성이 들리는 듯했다. “60여년을 메워온 원고지. 그러나 오늘도 다시 원고지 앞에 앉는다. 이제는 써야 한다. 후회 없는 작품을 써야 한다. 그리고 써가고 있다.”

[박화성처럼 생각하기]
네 살 때 성경… 억압받는 자 편에 서다


소설가 박화성은 60여년 작가생활을 통해 기독교 정신이 담긴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독교의 평등사상을 기초로 농민·노동자의 궁핍한 삶과 지배계급의 기생적인 생산양식을 파헤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에겐 기독교 신앙과 접목된 민족해방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었다. 그가 쓴 소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조선 노동자 착취와 조선 여성들의 인신매매 등을 내용으로 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신앙에서 출발한다. 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김수진 목사는 “박화성은 프레스톤 선교사로부터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날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마칠 만큼 신앙심이 깊었다”고 말했다.

박화성은 네 살 때 한글을 깨쳐 성경을 읽고, 다섯 살에는 한자를 해독하고, 일곱 살 때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신동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머리가 좋아 1년에 몇 번씩 월반해 열한 살에 고등과 4학년이 됐다. 그때 ‘유랑의 소녀’라는 소설을 썼다. 열다섯 살 때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아기 선생님’이라 불렸다.

작가는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일본어 사용 강요가 노골화되자 절필하고 낙향해 후배양성에 전념했다. 그는 “황금색 은행잎이 비처럼 휘날리던 늦가을의 영광중학원이 눈에 선하고, 인생의 고향 광주를 생각하면 북문 밖 교회에서 부녀야학 교사로 활동했던 고생스러웠던 나날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성작가에 대한 편견이 높았던 시절, 그는 철저한 현장조사와 사실적 묘사로 일제 강점기 억압을 고발하는 동반자적 문학을 했다.

목포=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