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2편>] 지금 교회는 개혁자들이 애써 찾은 하나님에게 다시 돌아가야

존 웨슬리의 신성구락부 출발점이 되었던 옥스퍼드성(城) 감옥 전경. 웨슬리는 당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성결운동을 전개했다.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벽'으로 파렐 칼뱅 베자 녹스의 모습을 새긴 대리석 조각상.
 
칼뱅 생가 박물관에 전시중인 기독교강요 초판.



 
서대천 목사


제2편 '오직 그리스도'를 시작하며

필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교개혁 현장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4개국을 답사했다.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진행한 장 칼뱅과 예정론 항의파인 아르미니우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영국을 변화시킨 존 웨슬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웨슬리의 발자취를 찾아 영국으로

필자는 이번 영성 순례의 첫 발걸음을 한반도 복음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영국으로 향했다. 종교 역사가 필립 샤프가 ‘장 칼뱅 사후 최고의 전도자’로 평가한 웨슬리의 발자취를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웨슬리가 어린 시절 공부한 런던의 수도원학교인 차터하우스와 그의 묘소가 있는 씨티로드교회를 방문했다. 그 다음은 웨슬리가 신학을 공부하고 성결운동을 일으킨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와 링컨 칼리지를 찾았다. 이곳에서 특별히 관심을 둔 곳은 웨슬리의 신성구락부(Holy Club) 출발점이 되었다는 옥스퍼드성(城) 감옥이었다. 당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성결운동을 전개했던 역사의 현장은 300년이 지난 지금은 관광지로 변해 있었다.

이어 브리스톨(Bristol)의 목회 현장과 엡워스(Epworth)의 웨슬리 출생지를 답사했다. 웨슬리의 목회 현장은 화려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의 목회현장이었다. 그가 말씀을 전했던 자리에 세워진 비석이 때마침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교구 삼아’ 오직 말씀을 들고 누빈 전도자의 땀이 배어있는 듯 하였다.

엡워스는 그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 목사가 사역한 곳으로 당시 교회와 생가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목사관이었던 생가는 웨슬리가 다섯 살 무렵 화재로 전소돼 새로 지었다. 어린 소년은 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때의 충격적인 경험은 일생을 두고 영혼구령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칼뱅의 조국 프랑스와 종교개혁의 현장, 스위스 제네바

영국을 떠나 파리에 도착한 필자는 프랑스 교회 역사와 관련된 지역을 돌아보고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2300㎞를 달렸다. 서울에서 부산을 3차례나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파리에서 칼뱅이 공부한 대학들을 살펴봤고, 칼뱅이 태어난 느와용과 청년기를 보낸 오를레앙을 방문했다.

느와용의 생가 박물관과 세례 받았던 성당 자리, 칼뱅의 부모님이 건축에 깊숙이 참여한 시청, 칼뱅이 처음 다닌 학교 등 칼뱅의 생애를 되짚어볼 수 있는 장소들을 답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당신의 종을 얼마나 세밀하게 준비시켰는지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에는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은 랭스 대성당, 생 레미 성당 등을 통하여 당시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여기서 종교개혁은 단순한 개혁을 넘어 죽음과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였음을 실감했다.

또한 종교 개혁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피를 흘렸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순교 현장인 바시(Wassy)와 파리를 순례했는데 이는 이번 답사의 가장 큰 영적 수확이었다. 위그노들이 고난의 찬송을 부르며 순교한 바시 학살 현장과 뜨겁게 타들어가는 불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외쳤던 위그노 화형 장소인 모베광장, 복음을 지키던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종소리와 함께 죽임을 당한 바돌로매 대학살 현장 앞에서는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후 방문한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엔 당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망명한 위그노들의 신앙공동체와 칼뱅이 목회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스트라스부르는 위그노들이 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주했던 곳이다. 이후 위그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다.

이후 스위스 바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니콜라스 콥의 취임 연설문을 대필해준 것이 문제가 되어 체포당하기 직전 조국을 탈출한 칼뱅의 발자취를 따라간 것이다. 쫓기는 몸이면서도 조용히 글을 쓸 장소를 원했던 칼뱅에게 필생의 대작 ‘기독교강요’를 출간하도록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문화, 출판의 도시 바젤에서 받은 감동은 실로 큰 것이었다.

이어 칼뱅이 하룻밤 과객(過客)으로 들렀다가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일생을 머물며 종교개혁을 일으킨 역사의 현장 제네바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복음의 사역자 양성을 위해 세운 제네바아카데미와 목회지인 성 피에르 성당, 종교개혁의 거인이 묻힌 초라한 공동묘지, 플랭팔레를 찾기까지 여정을 멈출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와 아르미니우스의 땅 네덜란드

답사팀은 마지막 일정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향했다. 에라스무스와 아르미니우스를 만나기 위해 라이든과 로테르담 등지를 답사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확실한 우군(友軍)은 아니었지만, 그가 쓴 ‘우신예찬(愚神禮讚)’은 1517년 루터가 내건 ‘95개 논제’보다 무려 6년 앞서 당시 부패한 교황권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유럽 전역에 개혁운동을 자극했다. 원래 충실한 칼뱅주의자였다가 예정론에 반대한 아르미니우스의 흔적도 살펴보았다. 칼뱅의 개혁주의신학과 아르미니우스의 예지예정신학이 공존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와 신학계는 이 두 사상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말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가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절규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번 답사에서 ‘주여, 어디 계시나이까(Ubi est mi Domine)’란 탄식이 나왔다. 이 탄식은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251∼356)가 치열한 영적 수련 중 외친 절규였다.

4개국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적 위기 시대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영국이 유럽연합(EU)을 떠나 고립의 길을 택한 것을 보면서 이 세대가 하나님을 떠난 영적 ‘브렉시트’와 ‘코렉시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브렉시트는 어쩌면 이 위기에서 돌이켜야 살 수 있다는 영적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는 영국에서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을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찾고 싶어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교회 유적지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 있을 뿐 종교개혁자들이 애써 찾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잃어버린 시대 현상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라고 외친 호세아의 경고를 다시 들어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주어진 과제는 바로 잃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찾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사진 서대천 홀리씨즈교회 목사
협찬:SDC인터내셔널스쿨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