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현장을 찾아서 <제1편>] 성경읽기로 복음의 정수 인식… 중세교회 교황권·연옥설 거부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출생한 통나무 집 전경.
 
생가 인근에 세워져 있는 츠빙글리 기념비.
 
통나무 집 현관에 생가를 알려주는 푯말이 붙어있다.
 
주도홍 교수


츠빙글리가 태어나서 여섯 살까지 성장했던 빌트하우스로 향했다.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생가로 가는 길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어떻게 스위스는 이토록 잘 정돈되고 정갈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울창한 푸른 숲, 거대한 위용의 백설 산꼭대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풍경화였다. 하나님은 멋진 창조주라는 점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절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츠빙글리 생가를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초라한 출생지

루터의 생가는 그럴듯한 박물관으로 조성돼 있고 폼 나는 관광지였는데 츠빙글리의 생가로 가는 길은 차량 내비게이션마저 찾지 못했다. 결국 물어물어 가야 했고 마침내 당도한 곳은 경사진 곳에 초라하게 자리 잡은 통나무집이었다. 통나무집은 안내자가 없었고 문도 잠겨 있었다. 인터넷에 나오는 꽃 장식조차 없었다. 현관은 동네 차도와 맞닿아 있었다. 츠빙글리의 생가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한국에서 온 필자를 맞았다.

통나무집은 99㎡(30평)가 채 안 될 것 같은 작은 2층 집이다. 외관을 둘러싼 진한 갈색 나무판은 부패해서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츠빙글리의 출생지를 나타내는 기념비 역시 외롭게 서있었다. 생가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산기슭 국도변이었다. 높이는 대략 2m, 두께는 40㎝ 정도의 바위에 츠빙글리의 동판 초상화가 부착돼 있었다. 초상화 아래엔 ‘종교개혁자 훌드리히 츠빙글리, 1484∼1531’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는 단순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했던 츠빙글리의 삶과 비슷했다.

독자성을 강조한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1484년 1월 1일 산골 농부인 아버지 요한 울리히 츠빙글리와 어머니 마리아 부르그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두 번째 결혼이었다. 츠빙글리는 여섯 살 되던 해 삼촌이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4년 동안 베에젠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열 살에 바젤에 있는 라틴어학교에 들어갔다. 이후엔 베른 라틴어학교로 전학했다.

학교에서 츠빙글리는 도미니크 수도사들에 의해 탁월한 음악성을 발견하게 된다. 수도사들은 츠빙글리를 수도원에 보내기 원했다. 하지만 부친은 아들이 수도사가 되는 걸 반대했다. 결국 츠빙글리는 1498년 베른을 떠나 15세의 나이로 비엔나대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1502∼1506년 바젤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6개월 동안 신학을 더 공부한 츠빙글리는 바로 목회현장에 뛰어들었다. 1506년 9월 글라루스교회에서 사제로 서품받아 목회를 시작했다. 어떻게 글라루스교회가 22세의 청년을 주임사제로 불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콘스탄츠 주교청의 감독을 받기보다는 교회 자체로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는 젊은 사제를 청빙한 것으로 보인다. 글라루스교회는 좋은 사택까지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농부의 아들이었던 츠빙글리는 서민적인 모습으로 교인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그의 학구열은 높았고 꺼지지 않았다. 고전을 탐독하고 교부들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또 헬라어를 배워 1516년 출간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읽었는데, 거기서 츠빙글리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결국 츠빙글리는 이를 통해 진정한 성경 이해로 나가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되었고, 중세교회의 단절된 성경 이해를 개혁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츠빙글리는 1516년과 1519년 새롭게 해석한 자신의 성경주석을 제시하며 종교개혁으로의 공개적 전환을 분명히 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행위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전환했다면 츠빙글리는 인식을 통해 전환을 시도했다.

츠빙글리는 “우리는 루터적이 아니라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말로 그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분명하지 않은 여러 과정을 거쳤지만,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정수를 바로 인식한 후에는 중세교회의 교황권과 연옥설, 성인들의 조작된 중보기도를 완전히 거부했다.

외적 말씀과 내적 말씀

츠빙글리는 1522년 9월 초 출판한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신성’에서 설교의 기본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문헌이야말로 인간의 문화와 지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츠빙글리는 기독교는 그 뿌리와 근원을 더 면밀히 숙고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뿌리와 근원이야말로 성경과 고대 교부들의 글이라고 확신했다. 이 글들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되며 그 말씀을 만날 때 살아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회복하며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츠빙글리가 말하는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이란 확신과 능력이라는 표현과 묶여졌는데, 교리적 관점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곧바로 확신이 넘치는 삶에 이른다는 말이다. 츠빙글리 역시 성경이해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긴장 및 모순, 비유해석의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성경 말씀을 만나게 될 때 사람들은 보다 분명하고 명료하게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중세교회가 말하던 전통적 성경해석과 철학적 해석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로 읽는 사람들을 명료하고 능력 있게, 확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말씀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근원적으로 바꾸며 세상이 요구하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해 세상을 이끄는 사람이 된다.

츠빙글리에게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능력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깨우치며, 사람들을 바로 살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 영의 명료성과 능력인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력과 마음을 여실 때만이 사람들은 믿음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르게 된다. 이를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성경읽기이다.

마지막으로 츠빙글리가 말하는 외적 말씀과 내적 말씀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1편 ‘오직 성경으로’를 마감하고자 한다. 선포의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의 명료성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데,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내적 말씀은 믿음을 성장하게 한다.

설교는 구원을 선포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실존적으로 역사하게 하는 사역은 성령 하나님 자신이다. 내적 말씀은 성령의 역사로 자신을 해석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을 불러일으키며 인간을 새롭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들을 때이다.

츠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 종교전쟁인 카펠 전투에 종군 목사로 나갔다가 로마 가톨릭 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로, 아쉬운 죽음이었다.

글·사진=주도홍 교수(백석대·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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