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이 시대 아벨의 울음 들었는가

고행·묵상·청빈을 삶의 지표로 삼은 고정희 시인은 스무 살 때까지 전남 해남 고향집에 머물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열린 창호지 여닫이문 사이로 시인의 손때 묻은 책들과 물건이 보인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생가 전경.



 
시인이 친필로 쓴 '고행·묵상·청빈'.




“애비는 돌아와/ 아내의 무덤에 비문을 새긴다…절제된 침묵을 무덤에 새긴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만납시다’…시온을 구하시러/ 강물처럼 그가 달려오리니/ 슬픔은 슬픔으로 구원받으리/ 오늘은 슬픔이라 이름받는 애비여”(‘망월리 풍경’ 중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시대의 모순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출간된 고정희(1948∼91) 시인의 ‘이 시대의 아벨’(83년)에 수록된 시다. 한 줄기의 빛이 어둠을 비추듯, 한 줄의 시는 상한 영혼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 그는 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시들을 썼다.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합창으로 불려야 하는지 제창으로 불려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해줄 것 같다. 역사의 누적된 슬픔을 넘어 희망의 강으로 이끄는 그의 시들을 따라 지난 10일 전남 해남으로, 광주 망월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259번지. 고정희 시인의 생가 앞 팻말엔 ‘이 집은 자유를 향한 시혼을 뜨겁게 불태우며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살다간 시인 고정희의 생가’라고 적혀 있다. 시인이 태어나 스무 살 때까지 머물렀던 고향집이다.

마당은 깊고 고요했다. 전형적인 농가 주택으로 방 세 개를 터서 서재로 만들었다. 책장 가득 빼곡한 책이며 시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 사이로 ‘고행’ ‘청빈’ ‘묵상’이란 글씨가 새겨진 나무 액자가 눈에 띄었다. 시인이 어떤 가치관으로 삶과 문학이 공존하는 삶을 살고자 했는지 느껴졌다. 책꽂이와 액자 곳곳에 노란색 나비 모양의 카드가 나비처럼 앉아있다. 카드엔 시인을 추모하는 메모가 빼곡했다. 시인이 밤새 글을 썼을 책상 위로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통에게로 가자

절망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남달랐다. 그는 상하지 않은 갈대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 다가가자고 말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상한 영혼을 위하여’ 중에서)

‘하늘 아래서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구원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기에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영원한 눈물 영원한 비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초월자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행·묵상·청빈, 그것은 삶의 지표였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70년 광주에서 ‘새전남’ ‘주간전남’의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시대의식과 여성문제에 눈을 떠갔다. 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후 91년 지리산 등반 중 급류에 휩쓸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10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나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 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 놓지 못한다. 삶과 이데아는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이다”라고 말해 왔다. 그의 이력이 삶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는 광주YW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챤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면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 사랑 정의의 정신을 실천해 나갔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하나의문화’에서 활동하는 등 여성 운동가로서의 사회활동도 했다.

그에겐 여러 의미의 고향이 있다. 육신의 고향 해남은 온화한 자연에 실린 한의 정서와 가락으로 시인의 길을 그에게 열어주었다. 고단하고 외로울 때 찾아가면 사랑과 희망을 충전시켜 주던 지리산은 그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늦은 나이에 입학한 한신대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그의 삶을 채워준 영혼의 고향이었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고향 해남을 생각하며 버텨냈다면 같은 기간에 밀어닥친 시대적 위기의식에는 한신대에서 길러진 종교적 도덕성으로 맞서왔다. 수유리 한신대는 진보신학교가 갖는 기독교적 해방 부분과 인근 국립4·19민주묘지의 저항성이 일치된 곳이다.

해남 생가를 나와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자그마한 동산이 나온다. 구릉 전체가 키 큰 해송들이 군락을 이룬다. 뒷동산은 그가 고등학교 시절 자주 올라와 저수지를 바라보던 곳이다. 사방의 넓은 들판과 언덕, 보리밭 마늘밭이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앉아 시인은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을 것 같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가 이 세상에서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지울 수 없는 얼굴’ 중에서)

시인이 앉았던 자리엔 현재 그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1980년을 지나온 모든 사람에게 그랬듯이 역사는 시인에게도 부여된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었다. 시인은 ‘광야의 선지자’처럼 우리에게 민중의 문제를 끊임없이 일깨웠다. 그가 자주 산책했던 뒷산 ‘송정 소나무 숲길’을 걸으며 마음은 광주로 향했다. “오월이라는 의미를/ 그대 저녁밥상에서 밀어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밥이다/ 오월이라는 눈물을/ 그대 마른 가슴에서 닦아내지 말라/ 광주는 그대의 칼이다”(‘망월동 원혼들이 쓰는 절명시’ 중에서)

이 시대 아벨은 누구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시는 기독교 정신을 올바르게 풀어 보여주는 복음의 노래였다. 인간을 향한 서늘한 열기로 가득 찬 사랑의 노래가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었다. 특히 그의 시 ‘이 시대의 아벨’은 시대의 어둠에 대한 인식이다. 구약성경(창 4:9∼10)에서 차용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대 초, 우리 사회를 ‘무고한 아벨’을 죽인 어둠의 시대로 시인은 인식했다. 형 가인에게 무고하게 살해된 아우 아벨을 찾는 하나님의 물음과 질타를 고정희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쏟아냈던 것이다.

“너의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의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어둠의 골짜기로 거슬러오르던/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이 시대의 아벨’ 중에서)

우리가 저버린 아벨은 누구인가. 아벨은 바로 억압받는 민중이며 억울하게 숨져간 사람들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국립5·18민주묘지’로 가는 길은 이팝나무 군락지였다. 도로변 양쪽에 이팝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밤새 눈이 온 듯 아스팔트는 흰 꽃이 흩뿌려져 있었다.

‘국립5·18민주묘지’ 제1묘역을 걸었다. 묘비명들이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주님의 나라 정의를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유난히 정이 많던 내 아들아 편히 쉬거라.” “사랑하는 아우야 네 죽음이 이 나라 역사를 다시 여는 밑거름이 되었다. 너의 넋이 이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이 보인다.”

주님이 우리에게 안락한 처마 밑에서 함께 살기 원했던 우리들의 아벨, 풍성한 산해진미 잔칫상에서 주린 배 움켜쥐던 아벨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시는 것 같다.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이 시대의 아벨은 누구인가.

그러나 시인은 춥고 어두운 겨울의 무덤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망과 용기를 간직하는 것만이 오직 어둠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이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손을 맞잡는 일/ 손을 맞잡고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안는 일/ 부둥켜안고 체온을 느끼는 일/ 체온을 느끼며 하늘을 보는 일이거니”(‘서울 사랑-어둠을 위하여’ 중에서)

묘원 어디선가 아카시아꽃 향기가 불어왔다. 무더운 여름을 예고하는 듯했다.

■ [고정희처럼 생각하기]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자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란 성경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고정희(사진) 시인에게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또 주님은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돌보시고 위로하시는 분이다. 그것을 믿는 시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강한 의지로 생명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노래했다. 즉 우리가 공평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있다면 이 세속의 흔들림을 겁낼 것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투철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시를 썼지만 늘 갈등했다. 좌절을 가져다 준 현실의 충격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현실로부터 받은 충격의 아픔은 아벨의 죽음으로 표상되는 ‘양심’과 ‘정의의 상실’이다. 그의 환부는 실낙원 기행(81년) 서문에서 나타난다. “신으로부터 진리로부터 내가 경외하는 크고 환한 빛으로부터 저만치 비켜선 어둡고 왜소한 나를 바라보며 눈 감아도 느껴지는 ‘비겁’이란 단어를 감춘다. 과연 나의 지성이 열망하는 정신의 가나안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기름 없는 램프만 들고 어두워오는 들판으로 밤마다 떠났다. 두 가지 고통이 뒤따랐다. 내가 나를 인식하는 실존적 아픔, 다른 하나는 나와 세계 안에 가로놓인 상황적 아픔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가 믿는 것을 실현하는 장이며 그가 보는 것을 밝히는 방이고 그가 바라는 것을 일구는 땅이었다.

해남·광주=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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