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 "성경적 해석하고 복음적 반응해야"

 


<기고>
강우중 목사(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미국에서 49 년 만에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대법원 결정으로 다시 한번 낙태에 대한 사회적 공방이 매섭게 오고 갑니다. 낙태에 대한 논의에서 사회적 피로감만 더 받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치열한 논의에 비해 한 발짝 새 걸음을 내딛게 하는 대안 제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낙태에 대한 논의는 낙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의학사전에서는 "낙태는 유산이라고도 하고 크게 자연 유산과 인공유산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인공 유산이란 임신 시기에 약물적 또는 수술적 방법으로 임신을 종결 시키는 것으로 정의”1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낙태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자의적 해석에 기초한 일방적 성격을 지닌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일방적 결정 이라는 것은 가볍게 내려지는 결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방적’과 ‘가볍게’는 결코 동일하게 해석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아픔과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낙태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낙태에 대한 논의는 옳고 그름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사정을 아우를 수 있는 대안 마련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낙태를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과 여성이 자기 몸과 인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가요?식의 구조로 접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정치의
문제, 이념의 틀에서 낙태를 논의하는 것은 지양되야 합니다. 낙태 문제는 사람의 이야기이며 사람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생명에 대한 책임 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낙태는 개인의 문제이면서 사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낙태를 고민하는 당사자와 그 사람이 속한 사회가 한 사람의 인생과 한 생명을 위해 함께 어떤 노력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2017 년 한 해 동안 캘리포니아에서만 13만2, 680 건의 낙태 시술이 있었습니다.” 이 숫자에 담긴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결국 낙태를 아픔과 고통으로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낙태라는 마지막 결정의 적합성 혹은 윤리성만 논하기보다는 오히려 낙태 문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되짚어 봐야 합니다. 우리 사회, 세대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일그러진 인식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의 심각성의 관점도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자각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이를 토대로 낙태는 한 개인의 문제로만 제한하여 사회의 책임으로 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둔감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습니다. 왜 원하지 않는 임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 낙태에 대해 고민하는 당사자가 느끼는 후회와 반성, 아픔과 공포, 고통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해 중점을 두고 논의가 이뤄져야 합니다. 

결국 낙태라는 지금 그리고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윤리-도덕적 판단에만 열을 올리기보다는 사회 윤리적 안목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 합니다. 나의 자리에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리로 옮겨가 그 문제를 함께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공감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공감력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고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와 정의를 명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연합이라는 개념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가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소개하듯이 이 ‘연합’에는 하나님의 속죄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 그리고 인내와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깨우침을 확보해야 연합 ‘된’ 자로서 연합’ 하는’ 자의 책임에 대한 다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연합’된’ 자 답게 ‘연합하는’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의 본질과 의미를 지켜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연합하는 삶은 하나님의 언약, 성경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근간에 기초하여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채워가고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는 인내, 겸손, 용기, 사랑, 친절과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하는 이야기가 가진 생명력을 ‘우리’ 스스로 줄이거나 포기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써 가셨던 연합하는 이야기는 지속해서 전개되어야 합니다.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성경적으로 해석하고 복음적으로 반응하며 ‘연합’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칼럼은 본사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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