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 삶 보듬기] 한 알의 밀알이 된 사람 박유산과 박에스더


볼티모어에 있는 박유신의 묘비. 마태복음 25장 35절이 기록돼 있다.


몇 년 전 볼티모어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박유산이라는 분의 묘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박유산이라는 이름이 생소했지만 볼티모어 인근의 오래된 공동묘지에 한국인의 묘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퍽 인상적이었다.

박유산(09/21/1868 - 04/28/1900)은 김정동이라는 여인의 남편이다. 김점동은 한국에 복음을 전한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에서 집안일을 돕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세운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의 4번째 학생이 됐다. 김점동은 성경과 한글을 비롯 하여 산수, 영어 등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영어실력이 뛰어나 14살 때인 1890년 이대부속병원의 전신인 보구여관에서 의료선 교사인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과 간호보조의 일을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1893년에는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의 일을 돕던 박유산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남편의 성을 따라 박 에스더가 됐다. 이들 부부는 윌리엄 제임스 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내 로제타 홀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박에스더는 1896년 현 존스 홉킨스 대학의 전신인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00년 졸업하여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 의학박사가 됐다. 박유산도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재능이 더 뛰어나고 공부에 대한 의지도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공부를 포기하고 식당과 농장에서 고된 일을 하며 아내를 뒷바라지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박유산은 폐결핵에 걸리게 됐다. 하지만 박유산은 사랑하는 아내의 졸업식을 보름 정도 남긴 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의사가 되어 귀국한 박에스더는 로제타 홀과 더불어 여성 환자를 진료하고 간호양성소를 설립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며 진료봉사 활동을 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당나귀를 타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진료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심각한 과로로 폐질환에 걸리게 되어 34살 (1910년 4월13일)이라는 나이에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됐다.

박유산은 열악한 상황에서 아내를 위해 헌신하다가 32살 젊은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볼티모어 낯선 땅 공동묘지 한편 에 묻혔지만, 그의 묘비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하늘의 비밀을 증언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아내 박에스더는 단순히 한사람의 의사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선구자요 순교자이며, 어두운 시대를 밝힌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 에스더와 같이 큰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며 한 알의 썩어져 가는 밀알과 같은 박유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볼티모어를 다시 방문하게 됐다. 처음 방문 때보다 더 설랬다.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연회 때문이 아니라 머나 먼 이국 땅 공동 묘지에 묻혀있는 박유산의 묘지를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는 기대 때문이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영광받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남강식 목사 (만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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