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d 경제인사이드] ‘人의 장벽’… 벼랑 끝에 몰린 자유무역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경제의 세계화’라는 큰 흐름을 형성했던 자유무역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이 변곡점이다. 취임 연설에서 “국경을 보호하고 우리의 상품과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힌 그는 강력한 ‘자국 중심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이탈도 자유무역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르면 이달 말부터 EU와 본격적인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협상을 개시할 전망이다. 영국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를 가결한 직후만 해도 시장 우려와 달리 차분했던 EU의 결속력은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EU를 지탱해 온 양대 축인 프랑스와 독일의 수장이 올해 바뀐다. 두 나라 모두 현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든 이들이 유력 후보군에 포진해 있다.
 
특히 프랑스 대선이 EU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보인다. 윤덕룡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프랑스가 EU를 탈퇴하면 EU 붕괴 상황까지 가게 된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일련의 움직임을 ‘자유무역주의와 보호무역주의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경제 패러다임이 작동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한국관광 금지 등 무역과 상관없는 조치를 취한 중국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 공통점은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중심에는 ‘자국 이기주의’가 자리한다. 경중은 있지만 전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나라처럼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피해가 더 크다는 데 있다.
 
20세기 이끈 자유무역주의
 
자유무역주의 역사는 19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에선 국가가 무역을 통제하는 기존 ‘중상주의’ 체계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했지만 영국이란 한정된 시장만으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게 원인이다. 상인과 기업가들은 국가 권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해외 시장에서 교역하길 원했다. 데이비드 리카도 같은 경제학자들도 국가의 인위적 무역 통제가 자원의 최적 배분을 왜곡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바로 자유무역주의의 시작이다.
 
영국을 중심으로 승승장구하던 자유무역주의는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위기를 맞았다. 경제력에서 비교우위에 서 있는 영국만 이득을 보는 자유무역주의를 반대해 왔던 독일의 논리와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상황이 맞물렸다. 반대급부로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해졌다.
 
보호무역주의와 엎치락뒤치락하던 자유무역주의는 1990년대 들어 전환기에 들어섰다. 1995년 기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역할을 한층 강화한 WTO 설립이 흐름을 바꿨다. WTO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한 자유무역주의 토대를 만들었다. 각국별 자유무역협정(FTA)과 역내 경제권 통합 움직임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1989년 체결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1993년 EU 탄생은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도 2004년 칠레와 첫 FTA을 맺으면서 통상정책의 중심에 자유무역주의를 배치했다. 7일 현재 우리나라는 모두 15건의 FTA를 발효 중이다. FTA를 맺은 나라는 54개국에 달한다.
 
“윈터 이즈 커밍(Winter is coming)”
 
좀처럼 주도권을 뺏기지 않을 것 같았던 자유무역주의에 지난해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취임 후 첫 행보로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결정했다. 이어 줄곧 ‘나쁜 협정’이라고 공격했던 NAFTA에 칼을 댔다.
 
트럼프 행정부는 NAFTA 재협상 가시화를 시작으로 기존에 추진해 왔던 자유무역주의 정책을 하나씩 뒤엎고 있다. 한·미 FTA도 도마에 올라 있다. 우리나라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는 위협도 트럼프의 작품이다. 이시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행정부가 의회의 승인 없이 취할 수 있는 보호무역주의 조치 중 하나”라며 “당분간 보호무역주의로 가게 될 미국의 핵심 키워드는 ‘윈터 이즈 커밍(Winter is coming·겨울이 오고 있다)’”이라고 설명했다.
 
EU에도 ‘위험한 기운’이 감지된다. 올해 치러지는 선거들이 분수령이다. 오랫동안 이어진 저성장에 따른 불만이 보호무역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현지시간으로 15일 예정된 네덜란드 총선이 ‘가늠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총선에선 극우파 자유당(PVV)이 약진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다툰다. PVV는 EU 탈퇴를 주장하는 국회의원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끌고 있다.
 
다음 달 23일 치러지는 프랑스 대통령 1차 선거에선 마린 르펜 국민전선 대표가 유력한 당선자로 떠올랐다. 르펜은 EU 탈퇴를 부르짖고 있다. ‘친EU파’이자 현재 정부의 경제장관을 지낸 무소속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의 2파전에서 누가 승리할지가 ‘태풍의 눈’이다.
 
EU 주요국의 선거 결과는 우리나라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U는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4955억 달러) 가운데 9.4%(466억7000만 달러)를 차지하는 4번째 교역국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선거 결과가 유럽 경제지표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나라 수출에도 여파를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경제 질서에 대비해야
 
전문가들은 각국의 자유무역주의 철회, 보호무역주의 강화를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재민 한양대 법대 교수는 “단순히 자유·보호무역주의 문제가 아닌 통상질서의 변화”라며 “자동차 몇 대 더 판다는 식의 접근이 이제는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 관광을 금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남재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드 보복은 공정경쟁이라는 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메시지”라고 했다. 미국이 자국 통상법을 중시하겠다고 밝힌 것도 비슷한 흐름이다.
 
새로운 체계에 대응하려면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일본의 경우 2012년 중국과 센카쿠열도 갈등을 빚으면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정책을 펴 왔다. 윤 선임연구위원은 “무역이 줄어드는 걸 준비해야 한다”며 “국내 시장을 어떻게 키울 건지도 고려해봐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세종=신준섭 기자 sman321@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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