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10) 교육전도사로 휘경교회 섬기며 ‘마음만은 담임목사’

김영걸 목사가 휘경교회 교육전도사 시절 서울 동대문구 교회에서 초등부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나는 신학대학원 입학이 확정된 후 서울 동대문구 위생병원 옆에 있는 휘경교회를 교육전도사로 섬기게 됐다. 초등학생 4~6학년을 맡았는데 당시 출석하는 아이들은 100여명 정도 됐다. 2년 동안 아이들을 열심히 섬기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150명 가까이 모였다.

교육전도사 1년 차일 때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모든 것이 서툴렀다. 2년 차가 되자 뭔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년 차 때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해 보니 초등학교 5~6학년에게는 여름성경학교의 영향력이 잘 통하지 않았다. 이미 그 아이들은 비슷한 여름성경학교를 대여섯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아닌 야외에서 캠프 형식으로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초등부 교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여름성경학교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흥미가 떨어집니다. 새로운 내용으로 아이들을 인도해야 합니다”라며 교사들을 설득했다.

교회로서도 안전이나 예산 등 여러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초등부 부장 선생님 및 교사들과 함께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휘경교회 교회학교 최초로 캠프 형식의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게 됐다.

처음 하는 캠프라 신경 쓸 일은 한 둘이 아니었다. 봉사팀도 꾸려야 했고 교사들에게 사명도 불어넣어야 했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한 달 동안 교회에 매일 출근했다. 비록 교육전도사였지만 마음만큼은 담임목회자 못지않았다.

2박 3일 동안 캠프는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진행됐다. 캠프 마지막 날 예배 시간이었다. 설교가 끝난 후 부장 선생님이 사회를 보러 강단에 올라와야 하는데 올라오지 않았다. 부장 선생님을 찾아보니 얼굴을 숙이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울고 함께 수고한 선생님들도 울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려고 심혈을 기울인 캠프였기에 준비한 모두가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신대원 수업을 들으러 갈 때는 걸음마다 기도하며 걸었다.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울컥하며 눈물이 나왔다. 이 교문을 들어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마음도 나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가 신대원에 입학한 1987년 6월 민주화 대행진이 일어났다. 학교는 이미 4월부터 어수선했다. 학교 광장에서는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외치는 광장 기도회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업은 계속됐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신대원에서는 학문만 잘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신학적 입장과 교회론을 가져야 할지 신학적 고민이 심해졌다. ‘나는 어떤 목회자의 길을 걸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동안 내가 한 갈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신대원 3년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목회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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