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걸 (6) 아버지 사역 따라 서울 전학… 성적 떨어지고 친구들 놀림감

김영걸 목사는 학창시절 방황할 때도 부모님의 기도 덕에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김충효(왼쪽 세 번째) 목사가 집에서도 정장을 갖춰 입고 가정예배를 인도하는 모습. 왼쪽 두 번째가 김영걸 목사.


나는 1970년 서울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가 서울 피어선성경학교 교무처장으로 근무하게 됐기 때문이다. 교회와 부모의 품 안에만 있던 나는 이때부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당시 아버지가 사역하던 덕수리교회 사임 절차가 늦어지면서 부모님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초 나와 누나를 서울 이모 집에 보냈다. 이모 집에서 4학년 1학기를 다니게 된 나를 이모와 사촌 형제들이 참 잘 대해줬다.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이모부는 의사셨는데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이모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모 집에도 자녀가 6명이나 있었다. 거기에 누나와 나, 두 명이 얹혀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공부할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나는 덕수리에서 늘 전교 1~2등을 다퉜는데 서울에 와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2살 때 앓았던 소아마비 후유증은 서울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당시 나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아 다리가 휘지 않았고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다리가 너무 약해서 제대로 달릴 수 없었고 아이들과 놀다가도 쉽게 넘어졌다. 걸어 다닐 때도 약간씩 절뚝였다.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무릎이 성한 날이 없어서 늘 ‘빨간 약’을 무릎에 바르고 다녔다.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넘어지면 이유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 ‘고무다리’라고 놀리기 일쑤였다. 달리기를 못 하니 나를 놀리고 도망가는 아이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체육 시간이 가장 싫었다. 체력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항상 꼴찌였고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당시엔 소극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는 피어선학교를 사임하고 경북 안동 경안성서신학교 교무처장으로 가게 됐다. 부모님이 안동으로 가면서 나는 이번엔 외삼촌인 조기흥 장로님 댁에 맡겨졌다. 부모님은 온 가족이 안동에서 생활하기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셨다. 또 내가 학창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 댁에서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외삼촌은 배울 점이 많은 분이셨다. 피어선재단 사무국장으로 계시면서 후에 피어선신학교를 평택으로 이전시키고 지금의 평택대를 설립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신앙부장을 맡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앞에 나가서 찬송을 인도한 뒤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목사처럼 아침 경건회를 인도한 것이다. 이때 같은 반 친구가 정훈 여수여천교회 목사(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서기)다. 지금도 정 목사는 나에게 “김 목사는 그때부터 목사 같았어”라고 말하곤 한다.

겉으론 제법 목회자 같았지만, 부모의 품을 떠나 서울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많은 방황을 했다. 붙잡아줄 부모가 옆에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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