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이상 (6) 내 인생 길잡이 어머니, 천국 확신하며 주님 품으로

유이상 대표 모친의 장례식 모습. 고창 성북교회장으로 치러진 1992년 당시 성도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두 흰색 상복을 입은 채 상여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마을 들길을 걸었다.


큰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둘째인 아버지가 장손 역할을 하셨다. 아버지는 ‘근면성실’이 몸에 밴 농부였고, 어머니는 언제나 강단 있는 모습으로 집안 대소사를 통솔하셨다. 엄격하고 바르며 소신이 뚜렷한 천생 리더였다. 부모님이 보여주신 삶의 태도는 내 인생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우리 8남매의 자녀가 총 32명이다. 이렇게 대가족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애환이 있기 마련인데, 부모님은 형제 중 어려운 일이 생기고 우환을 겪으면 작은 것이라도 꼭 성의를 표시하라고 가르쳤고, 이는 우리 형제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68세의 나이에 위궤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의 적적함을 달랠 겸 시골집을 개축했다. 본채를 헐고 짓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작은 채에서 지내셨는데 불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주무시다 그만 중풍에 걸리셨다. 당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나는 어머니에게 교회에 나가실 것을 권했다. 다른 이유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간다는 기다림이 어머니에게 살아가는 힘을 될 것 같아서였다. 헛헛함을 달래볼 요량으로 교회 출석이 시작됐지만 어머니 신앙은 날로 깊어졌다. 부흥회 때 현금이 없을 때 자식들이 맘먹고 해준 금가락지, 금비녀 같은 귀한 것들도 아끼지 않고 헌물을 드렸다.

어머니가 한 차례 중풍에서 회복된 지 10여년이 지나고 78세 때 다시 중풍이 발병했다. 이번엔 죽음을 예견하셨는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는다. 너희 8남매 모두 출가시켰고 어미로서 소임을 다했다. 저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데 병원에서 주삿바늘 꽂아 놓고 몇 달 더 살겠다고 왜 고생을 하겠냐. 너희들도 객지 생활하느라 바쁜데 어미가 병원에 있으면 되레 수시로 들여다 봐야 할 게다. 그런 일은 안 하련다.”

어머니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녀들의 객지 생활을 걱정하셨다. 어머니는 고향 집에서 미국에 있는 막내 동생을 제외한 7남매가 지켜보고 잔잔하게 찬송이 흐르는 가운데 내 품에서 영면하셨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셨던 어머니, 천국을 확신하시며 죽음을 맞이하신 믿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내 기도 제목은 딱 하나였다. ‘하나님, 어머니의 믿음을 제게도 주옵소서.’

장례는 어머니가 다니시던 고창성북교회 주관으로 진행됐는데 그 과정들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교회를 담임하시던 전대웅 목사님은 집례하는 모든 과정마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정성을 다하셨다. 하얀 상복을 갖춰 입은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은 상여에 하얀 줄을 연결해 1㎞가 넘는 들길을 찬송하며 걸었다. 신앙의 유무를 떠나 온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소와 돼지를 잡고 문상 오신 분들을 풍성하고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온 마을 사람들이 가족처럼 애정을 갖고 장례에 참여해주시면서 그러잖아도 대가족이던 우리 식구는 마치 하나의 작은 민족을 이룬 듯했다. 애도해 주신 모든 분이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을 기리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어머니가 더 그리웠다. 그 장면들이 평생을 품고 가야 할 감사가 됐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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