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이상 (4) 학원 일 도우며 무료수강… 상경 4년 만에 대학 배지 달아

유이상(뒷줄 오른쪽) 풍년그린텍 대표가 1970년 서울 영등포구의 한 사진관에서 고창 동창들과 찍은 기념사진.


서울에 올라온 지 햇수로 3년이 되던 1967년. 당시 내가 살던 모습은 농촌에서 홀몸으로 상경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형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며 가까스로 미래를 준비하던 터라 사는 데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입 단위는 언제나 최소였다. 쌀은 한 됫박씩, 연탄도 한두 장씩 사서 썼다. 밥 위에 올린 마가린, 거기에 간장 몇 숟가락을 끼얹어 비벼 먹으며 끼니를 채웠다.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았다.

이모 댁에서 거처한 지 3년여 만에 집안 어른이었던 아저씨네로 거처를 옮겼다. 신문 배달일을 배우는 동안 아저씨가 숙식을 해결해줬다. 일을 배우는 사람들의 시작은 대개 비슷했다. 처음엔 일한 삯을 받기에 앞서 밥을 해결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차츰 일한 대가라기보다는 용돈에 가까운 품삯을 받았다.

신문 배달 일을 하던 종로에는 학원이 많았다. 유명한 선생님의 강의에는 200~300명씩 수강생이 몰렸고 입구에서는 일일이 한 사람씩 수강증을 검사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기도’라 불렀다. 극장이나 유흥업소 등의 출입구를 지키는 사람을 일본어로 ‘기도’라 부른다는 걸 그때 알았다. 신문 배달하는 고학생들은 기도 일을 하면서 학원 강의를 무료로 듣곤 했다.

신문 보급소에서 먹고 자는 시원찮은 환경에다 새벽부터 뛰어다니며 200부 이상의 신문을 돌리고 저녁에는 신문 대금을 수금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몸은 언제나 지쳐 있었다. 그 중간에 학원에서 강의를 듣는다고 기도 일을 한 후 맨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들으면 곧 졸음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1968년 2월. 그날도 신문 묶음 덩어리를 메고 광화문 앞을 지나던 길이었다. 그때, 노란색 서울대 배지를 단 청년 셋과 마주쳤다.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집성촌이었던 고향의 나와 같은 유씨 셋이 서울대에 합격해서 입학 전 서울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어깨에 짊어진 신문 덩어리가 그들의 노란색 배지 앞에서 더욱 무겁고 아프게 느껴졌다.

친구와 반갑고도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마다 신문을 던져 넣으며 묘한 기분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친구의 노란색 배지가 오래도록 나를 흔들었다. 그래서 대학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반드시 대학에 들어간다’는 각오로 그때부터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신문 보급소를 나와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었는데 재수를 하는 다른 중학교 동창 친구 2명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우리 셋은 그해 12월 대학 입학 고사를 봤다. 이른바 ‘예비고사’라는 시험이 처음 생긴 해였다. 그해 11만2000여명의 수험생이 예비고사를 봤고 6만1000여명이 합격했다. 셋방의 수험생 삼총사는 나란히 합격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본고사가 남아 있었지만 드디어 대학생이 될 자격을 얻었다는 생각에 삼총사는 펄쩍펄쩍 뛰며 기쁨을 만끽했다.

결국 우리 삼총사는 국민대 행정학과에 최종 합격했다. 첫 등록금은 4만2000원 정도였다. 그중 절반을 스스로 마련하고 고향에 있는 형과 누나들이 기특하게 여기며 절반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지 4년 만에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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