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이태원역 1번 출구’의 애도



다시 참사다. 온 나라가 충격과 슬픔에 잠긴 사회적 참사다. 그래서 사고냐 참사냐의 논쟁은 단순한 말꼬리 잡기가 아니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사고’라는 말로는 이 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직감한 대중 정서를 무시한 결과다. 관료들의 불순한 의도는 아닐지 몰라도, 언어가 전혀 다른 현실을 만든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대중을 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158명의 안타까운 생명을 잃은 참사 앞에서 진정한 사회적 애도의 길을 묻는다. 사회적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어떤 애도의 언어와 형식을 취해야 할까? 어떤 것이 유족과 함께 우는 더 나은 길일까? 정부는 참사 다음 날부터 6일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공공기관의 조기 게양, 공무원의 근조 리본 패용, 시급하지 않은 축제 및 행사의 취소 혹은 축소가 권고됐다. 모든 국민이 함께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이번 일에 국가 주도의 추모라니 영 어색하다. ‘시민’의 시대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충분한, 합당한 사회적 애도를 담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이 주목된다. 참사 직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만들어낸 공간이다. 정부가 설치한 합동분향소가 짧게는 5일, 길게는 2주간 운영되다 철거됐지만 이 자생적 추모 공간을 찾는 행렬은 지금도 이어진다. 온라인에는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비장한 순례기가 넘쳐난다. 이제 ‘이태원역 1번 출구’는 우리 사회가 이번 참사를 애도하는 고유한 방식을 일컫는 대명사가 됐다. 여기서 이 시대 사회적 애도의 길잡이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선 망자를 추모하는 전통의 차이가 중요치 않다. 목탁과 염불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깨고, 한구석엔 크리스천을 위한 기도 방석이 놓여 있다. 개신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무속에 이르기까지 자기 종교의 언어로 예를 갖춰 추모한다. 기도, 참선, 오체투지, 진혼굿이 한 곳에서 펼쳐지며 국화, 촛불, 술, 음료, 물병, 과자 등 넋을 달래는 저마다의 물건들로 가득하다. 여러 전통의 의례가 한데 섞여도 낯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시민적 의례의 재탄생이 보인다.

또 이곳의 애도는 철저히 자발성에 기초한다. 합동분향소에서는 추모객의 헌화와 묵념이 장례지도사 안내에 따라 매끄럽게 진행되지만 여기선 절, 묵념, 기도, 통곡 등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도하면 그만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헌화를 위한 무료 꽃 상자가 연일 채워지고, 인근 가게는 추모객을 위한 방명록을 준비한다. 말끔하고 계획된 질서는 아니지만 어수선함과 혼돈 가운데 세워진 나름의 질서가 있다. 이름 모를 자원봉사자들 덕이 크다. 현장 정리와 청소, 쪽지 관리 등을 스스로 도맡는 이들이다. 물품이 바람에 날릴까 테이프로 고정하고, 비에 젖을까 비닐로 감싸 안았다.

무엇보다 이태원역 1번 출구의 애도에는 참여가 핵심이다. 다양한 글귀를 담은 각색 포스트잇 물결이 그 징표다. 대구 지하철, 팽목항, 강남역, 구의역, 신당역 등 사회적 고통의 현장마다 면면히 이어져 온 시민적 의례의 원형이다. 진정한 애도는 침묵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희생자를 향해, 유족을 향해, 사회를 향해, 국가를 향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데, 이번 참사의 성격을 보여주듯 말하는 언어마저 여럿이다. 희생자를 향한 짙은 미안함이 주된 정서이며 잊지 않겠다는 다짐도 묵직하다.

애도는 함께 울고 슬퍼하는 일이다. 공감의 언어와 몸짓이어야 한다. 이태원역 1번 출구는 차이와 경계를 초월해 시민들 스스로 자기 목소리로 참여하도록 허용할 때 비로소 사회적 애도가 가능하다는 걸 역설하는 현장이다.

박진규(서울여대 교수·언론영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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