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투명하게 관리해주고 사후에는 요청한 곳에 기부 ‘유언대용신탁’

한국이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공익 신탁을 통한 기부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유언대용신탁’은 생전에 신탁계약을 한 뒤 사후에 원하는대로 기부할 수 있어 기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수년 전 향년 80세로 별세한 김순이(여)씨는 사망하기 전 거주하던 아파트를 팔고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면서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었다. 요양원에 와서도 김씨의 걱정은 쌓여만 갔다. 바로 본인의 재산 문제 때문이었다. 갑자기 사망했을 경우 본인의 형제자매와 사망한 자매의 조카들이 서로 상속재산을 두고 다툴 것 같았다.

김씨는 요양원 원장과 상담을 했고 객관적이고 투명한 관리를 위해 ‘신탁’을 알아보게 됐다. 이후 금융기관을 찾아가 금전을 신탁하면서 본인 사후 교회에 1/2, 대학에 1/2을 기부하도록 했다. 김씨는 신탁을 통해 재산을 관리하다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신탁 재산을 관리하던 수탁자는 김씨의 요청대로 교회와 대학에 기부했다.
 
초고령사회 눈앞, 기부·신탁이 뜬다

기부의 활성화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고려사안이 되고 있다. 사회를 통해 얻은 부가 나이 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이들에게 나눠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막연한 기부보다는 목적이 뚜렷한 기부 활동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신탁’은 이러한 관점에 부합하는 제도로 평가된다. 신탁은 재산을 믿을 만한 사람 또는 기관에 맡겨 원하는 대로 관리·운용할 수 있는 재산관리 방법이다. 재산을 신탁으로 맡긴 자를 위탁자, 재산을 관리·운용하는 자를 수탁자라고 일컫는다. 신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언대용신탁’이라는 것을 만날 수 있다. 신탁을 설정하면서 위탁자가 원하는대로 관리·운용한 뒤 위탁자 사후에 미리 정해놓은 대상에게 재산을 이전해 줄 수 있는 신탁이다. 위탁자 사후에 ‘유언’의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유언대용신탁이라고 한다.
 
생전 신탁계약, 사후 원하는대로 기부

유언대용신탁이 어떻게 기부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일반적인 유언장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구별된다. 사후에 기부가 이뤄지려면 유언을 남겨야 한다. 민법에선 정해진 절차대로 유언장을 남기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유언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유언장은 마지막에 작성된 유언장이 법적효력을 갖는데 은행에선 제시된 유언장이 마지막에 작성됐다는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다. 유산 기부 뿐 아니라 모든 상속예금 지급에 있어 유언장 방식은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당사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면 의도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오영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9일 “핵심은 생전에 신탁 계약을 통해 설정을 하고 사후에 기획한대로 재산이 분배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유언대용신탁은 사전에 재산들을 언제 어떻게 어느 단체에 얼마만큼 기부할 것인지 등을 상세하게 설정할 수 있다”며 “오로지 본인이 설정한 바대로 분배가 되기 때문에 사후에 내 재산이 제대로 사용될 지 여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철저히 위탁자의 의사에 따라 기부가 이뤄져서 효율성과 만족도가 높다”고 덧붙였다.

해외 선진국에선 이미 유언대용신탁 및 기부가 일반화됐다. 일본의 경우 2000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상속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게 됐다. 유언장 쓰기 운동과 함께 신탁의 장점과 필요성이 부각됐다. 특히 일정한 재산 규모를 가졌지만 치매 등 정신적 제약이 있는 사람들은 법원에서 신탁을 통한 관리를 권유할 정도다. 나아가 사후 수익자를 정하는 신탁을 통해 자신의 상속인 또는 절 등 종교단체에 기부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하는 고령자들이 5년 간 2배 이상 늘었다. 미국도 신탁재산에 대한 세제혜택 등에 힘입어 유언대용신탁을 통한 기부 등이 오래 전에 자리매김했다.
 
세제 혜택, 수탁자 범위 확대해야

앞으로 한국에서도 유언대용신탁 및 기부가 활성화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진국처럼 세제 혜택이 우선돼야 한다.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신탁을 통한 유산기부 플랜을 설정할 경우 미국의 ‘CRT(Charitable Remainder Trust)’처럼 신탁에서 기부자의 생활을 위한 소득 지출을 허용하고 남는 재산이 사회적 기부활동에 쓰여지도록 유도하는 세제 혜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경우 ‘레거시(Legacy)10’이라는 제도를 통해 상속인이 유산의 10%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기존 법정상속세에서 10%를 감면해주고 있다. 또 세율도 일정 부분 낮춰 생활 속에서 유산기부를 유도해 내고 있다.

아울러 수탁자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국내 신탁업은 은행, 증권사, 보험사, 부동산 신탁사 등 4곳이 주로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 선진국에선 금융사들만이 아닌 일반 로펌, 회계법인 등 다양한 곳에서 신탁업을 수행한다. 수탁자가 될 수 있는 주체가 많아져야 경쟁이 되면서 수수료가 내려가고 양질의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

오 교수는 “사실 로펌들만큼 공익 신탁을 잘 관리·운용할 수 있는 주체도 없기 때문에 이들을 포함한 수탁자 범위 확대는 필수적”이라며 “변호사 등이 일찍이 신탁업을 제대로 숙지할 수 있도록 대학원에서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박지훈 최경식 기자, 조재현 우정민 PD lucidfall@kmib.co.kr

박지훈 최경식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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