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



1981년 2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신군부에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무겁고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때였다. 일 년 내내 최루탄 가스 자욱한 뒤숭숭한 캠퍼스에서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의 들뜬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진지한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허전하고 불안정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매일 빈 강의실에서 눈물지었다.

나는 대학 2학년 개강을 앞두고 사흘간의 청년부 겨울 수련회에 참석했다. 세검정에서 북쪽으로 2~3㎞ 떨어진 모 대학 수련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에 눈밭에서 축구를 했고 로마서를 공부했는데 의문만 남았으며, 밤에 한 자매가 큰소리로 방언을 해서 놀랐다. 큰 감동은 없었고 피곤했다. 집안일과 학교를 생각하며 걱정만 한 아름 안고, 버스정류장으로 혼자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중간쯤 왔을까, 저 멀리 버스길이 보이고 사람들이 왕래한다. 아침나절, 날씨는 화창하고 양지쪽은 봄기운에 눈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에서 환한 빛이 밝아오더니 이내 온몸과 마음을 감싸는 것이었다.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그래서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가득 찬 느낌이다. ‘아, 이게 바로 사람들이 신비적 체험이라고 하는 것이구나’라고 직감했다. 눈물과 함께 조용한 기쁨의 찬송이 흘러나왔으며 누구라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에게 희망에 관해 물을 때면 40년도 더 된 이 체험이 떠오르곤 한다. 지난 주간에도 어떤 선교대회에서 내가 강연을 마치자 한 선교사님이 질문했다. 코로나 이후 선교지 형편이 이렇게 어려운데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사회와 교회가 조로(早老)와 무기력증에 빠져 어떤 희망도 주기 어렵다고 대답하며 또다시 이 체험을 떠올렸다.

이 체험은 희망에 관해 나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첫째는 어떤 어두운 현실 가운데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희망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영혼 깊은 곳에 주어진다.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주어지니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빼앗아 갈 자도 없다. 한번 심어진 희망은 사라지지 않기에 여간한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않는다. 힘에 부칠 때쯤 되면 그 희망은, 본질은 같으나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

성경은 온통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미신적인 왕과 치명적 왕비의 집요한 추적에 전의를 상실한 엘리야는 광야에서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망국의 절망 속에 홀로 앉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시험에 깊이 빠진 한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후 그 안에서 피난처를 얻었다. 바울은 춥고 음습한 로마의 감방에서 그의 곁에 서신 주님에게서 힘을 얻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체험을 지나친다면, 아니면 알기는 하지만 그 체험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뭐 하러 성경을 읽나.

둘째, 하나님 임재의 체험에서 절대적 희망을 발견한 후 다른 것들은 거짓된 희망임을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되고 민주화에 성공한 것이 대견스럽기는 하지만 오늘이라도 당장 허구로 드러날 가짜 희망이다.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신학적 탁월성과 대규모 집회와 자금을 동원한 선교와 개혁의 노력 같은 것은 희망의 결과물이지 희망의 원천이 아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애송이 청년 시절이나 40년이 지나 온갖 이력으로 치장한 지금이나 나의 희망은 오직 주님을 사모함에 있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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