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죽음은 이생 너머를 내다보는 발돋움… “믿음은 승리하고 빛을 보리라”

게티이미지뱅크










“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슬픈 노래 부르지 마세요/내 머리맡에 장미도/그늘진 삼나무도 심지 마세요/위에 녹색 잔디를 덮어/소나기와 이슬방울에 젖게 두세요/하여 생각나면 기억하시고/잊으려거든 잊으세요/그림자도 못 보고/비도 못 느낄 거예요/나이팅게일이 고통스레/울어대도, 안 들릴 거예요/뜨지도 지지도 않는/황혼 속에서 꿈꾸다가/어쩌면 기억할지도/어쩌면 잊을지도 몰라요.”(‘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영문학사에 기록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시 가운데 하나인 ‘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를 쓴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사진)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세련된 시어와 운율, 신비스럽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 세계로, 같은 해 태어난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과 여성 시인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로 시작하는 모차르트 자장가의 노랫말이 로세티의 시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글쓰기를 성직처럼 여겼던 로세티에게 “자연이 윌리엄 워즈워스(영국의 대표적인 계관시인)의 삶이듯 종교는 로세티의 삶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신앙은 로제티의 삶 자체이면서 영혼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고독과 병고에 시달리며 종교적 절제 속에서 ‘죽음’을 주제로 시를 썼던 로세티에게 ‘글쓰기’는 삶을 지탱시켜주는 ‘예배’였다.

로세티 가문의 여성들은 경건한 성공회 신자였다. 로세티는 열두 살 때 어머니와 언니 마리아와 함께 크라이스트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언니 마리아는 성공회 수녀가 됐다. 이후 로세티는 영국 성공회에 심취했고, 이후 인생에서 종교적 헌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로세티가 제시하는 시와 예배 사이의 연관성은 소네트 연작시 ‘이후의 삶’에서도 발견된다.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영원한 세계의 모습을 포착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잃었던 자들을 찾은 곳/믿음이 승리하고 순교에 면류관이 씌워진 곳/미련한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이긴 곳/바로 이곳에서 먼지가 되었던 성도들이 일어나고/왕의 죄수들은/풀려나 빛을 보리라.”

그의 신앙은 창조력과 상승 작용하며 자아 형성에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시를 쓰는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자아의 변화에 중점을 둔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더 나은 부활’이 대표적이다.

“내 삶은 깨진 잔과 같네/내 영혼을 위한 물 한 방울/혹한 속에서 마실 술 한 방울/담지 못할 깨진 잔/쓸모없는 그것을 불 속에 던져/녹이고 다시 주조해/나의 왕이신 그분을 위한 최고의 잔이 되게 하리라/오, 예수님 저를 들고 마셔주소서.”

로세티는 종교적인 엄격성과 영적 순결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오빠의 친구인 젊은 화가와 약혼했던 로세티는 약혼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파혼을 선언했다. 14년 뒤인 1864년 아버지의 제자 찰스 배것 케일리가 청혼했으나 거절한 것도 그에게 종교적 신앙이 없었다는 이유로 전해진다.

그는 ‘죽음’을 주제로 가장 많은 시를 썼다. 왜 죽음이란 주제에 천착했을까. 그는 죽음 관련 시어를 통해 내세에 대한 신념을 자주 드러낸다. 죽음은 로세티의 시에서 지상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로 옮겨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오히려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이되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표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죽음이란 주제는 이생 너머의 시간을 내다보는 ‘발돋움’이자 ‘영적 투쟁’이었다.

또한 로세티의 죽음 시편들은 겉으로 매우 순종적인 여성이 죽음을 수용하고 연인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남성 위주의 현실에 저항하는 몸짓을 은밀히 담고 있다.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는 ‘기억해 주세요’는 그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의 자아 정체성과 독립성을 전달한다.

“나를 기억해주세요 내가 떠나거든/고요의 나라로 멀리 떠나가거든/당신도 더 이상 내 손을 잡지 못하고/나도 가던 길을 돌아와 머물지 못하게 되거든/나를 기억해주세요. 더 이상 매일같이/당신이 계획한 우리의 미래를 못 들려주게 되거든/꼭 나를 기억해주세요. 그때 가서/의논하고 빌어봐야 늦는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요/하지만 당신이 나를 잠시 잊었다가/훗날 기억하더라도, 슬퍼하지는 마세요/어둠에 싸여 썩더라도 한때 내가 품었던/생각들의 흔적이라도 남는다면/당신이 기억하고 슬퍼하는 것보다는/당신이 잊고 미소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은 어머니이자 아내였고 체념과 순종으로 남편을 위로해야 하는 존재였다. 로세티는 여성 특유의 온순하고 수동적이며 서정적인 시들을 써 당대의 주요 흐름을 따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전 여성 시인들과 다르게 주체적인 정서와 다른 차원의 시적 기법을 구사했다. 끊임없이 자의식과 긍지, 자기주장을 드러냈다. 그는 여러 시에서 전쟁, 노예제도, 동물학대, 미성년자 매춘 등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담았고 가부장 문화에 대한 저항과 산업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로세티는 세상의 부나 권력보다 영혼의 안식을 중요시했다. 기독교 정체성을 ‘거류민과 나그네’(벧전 2:11)로 표현했다. 1863년 발표한 시 ‘순교자의 노래’ 중 일부이다. “우리는 기쁘게 만난다네, 헤어질 땐 비록 슬퍼도/우린 오늘 밤 헤어져도 내일은 만난다네/걸어간 길이 홍수이든 피 흘림이든/모두 똑같이 하나님 계신 고향으로 이끌어 주네/우리의 길이 거대한 용광로의 불이라 해도/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동행하시리.”

또 ‘수녀원 문턱에서’는 피의 순교와 수도원 순교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수도원에 갇혀 지내는 관조적 삶을 선택한 여성들의 ‘삶 속 죽음’ 경험을 탐구했다.

로세티의 문학적 토양은 가정환경에서 만들어진 듯하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망명 작가이자 단테 연구자인 가브리엘레 로세티, 오빠는 라파엘전파(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으로 라파엘로 이전 작품에서 영감을 찾고자 했다)를 주도적으로 이끈 화가이자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이다. 또 다른 오빠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와 언니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세티 역시 작가였다.

문학과 예술에 둘러싸여 자란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열두 살 되던 해부터 시를 지었고, 스무 살인 1850년엔 오빠와 친구들이 만든 라파엘전파의 잡지에 7편의 시가 실렸다. 동생의 천재성을 알아본 오빠의 권고로 어릴 때부터 시를 썼다.

첫 시집 ‘고블린 도깨비 시장’(1862)이 출간되자, 한 해 전 작고한 당대 최고의 여성 시인이었던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자리를 대체하는 걸출한 작가가 나왔다는 찬사를 받았다. ‘고블린 도깨비 시장’은 과일장수 도깨비들의 유혹, 그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는 한 소녀와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이끄는 담대한 다른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장편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성서’, 존 밀턴의 ‘실낙원’,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 등에 담긴 내용을 여성 작가의 관점에서 다시 쓴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외에 그가 남긴 시집으로 ‘왕자의 행렬과 다른 시들’(1866) ‘비망록’(1870) ‘노래: 전승동요집’(1872, 1893) ‘한 가장행렬과 다른 시들’(1881) ‘시들’(1893) ‘새 시들’(1895) ‘오르막길’(1887) 등이 있다.

이후 로세티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뒤를 이을 계관시인의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암 투병으로 무산됐다. 로세티는 1894년 ‘기억해 주세요’에서처럼 죽음을 가볍게 딛고 고요의 나라로 떠났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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