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작은 연못



‘작은 연못’. 1972년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노래다. 노래도 가수도 예뻤는데 노랫말은 스릴러다. 깊은 산 작은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단다. 어느 여름날 이 둘이 서로 싸웠고 한 마리가 죽어 물 위에 떠올랐다. 죽은 붕어의 살과 함께 물도 썩었고, 연못은 아무도 살 수 없는 검고 더러운 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노래는 ‘아침 이슬’ 등과 더불어 금지곡이 됐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북 화해를 조장해서거나 아니면 당시 권력자들의 다툼을 비꼬았다는 이유라고 한다.

‘작은 연못’은 꼭 50년 만에 ‘오징어 게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번에는 예쁜 노래가 아니라 방대한 스케일의 피와 살이 튀는 폭력 드라마다. 게임 참가자는 붕어 두 마리에서 456명으로 불어났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캐릭터가 뚜렷하고 사연이 절절하다. 생존과 탐욕이라는 모티브가 서로의 꼬리를 문 두 마리 뱀처럼 얽혀 있다. 경쟁과 갈등, 속임수와 겁박, 혐오와 차별, 배신과 복수, 분노와 절망 등이 매회 원색적으로 펼쳐진다.

‘오징어 게임’에서 명대사 하나를 꼽으라면, 오일남 할아버지의 외침이다. “그만해, 나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 너무 절박하고 강렬하여 듣자마자 귀와 눈에 새겨졌다. 위선을 들어낸 노골적 디스토피아, 무섭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21세기 대한민국이 바로 ‘오징어 게임’이 펼쳐지는 무대다. 도대체 장르가 뭔지, 코미디로 시작하건, 훈훈한 가족 드라마로 시작하건, 결국 막장 폭력 스릴러로 끝난다. 여야의 협치나 노사의 상생은 없고, 고소·고발과 수사·기소만 남았다.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사이의 존경과 애정을 기대하기 어렵고, 심지어 남친과 여친 사이도 살얼음판이다. 이러는 사이 대한민국은 조만간 소멸할 전망인데, 이는 전염병이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낳지 않아서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작은 연못’과 ‘오징어 게임’에는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던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연못 속에서 또는 외딴 섬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관찰하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는 노래를 만들고 드라마를 제작하여 이 참혹한 비극을 세상에 널리 알렸으며, 시청자는 이들의 노력으로 이 사건을 알게 되었다.

‘오징어 게임’의 작가는 드라마에서처럼 경쟁을 뚫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섰다. 모르긴 몰라도 그 세계에서의 게임의 룰은 드라마 속 게임보다 더 잔혹하고, 경쟁은 더 처절하며, 감독과 배우가 번 돈은 456억도 넘을 것이다. 만일 이미 승자의 반열에 오른 ‘오징어 게임’ 시리즈의 제작자가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하여 더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닌다면, 이 드라마 자체가 디스토피아의 일부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시청자들이 이 시리즈를 눈요깃거리로 삼아 소비하고 감정을 배설한다면 우리 사회의 희망은 없다. 이들의 ‘전지적’ 시점은 오만하고 어리석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해방의 통로로 사용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하여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고,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든 환경과 역사를 배우고, 경쟁 사회의 일부가 되어버린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현실의 굴레를 떨치고 일어날 결심을 한다면 작은 희망이 있다.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유리하다. 그리스도인은 본시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습관이 있으며, 매일의 기도 속에서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며, 성령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하신 ‘깐부’가 우리 곁에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장동민 백석대 교수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