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오징어게임’에서 읽어야 할 것



수업에서 학생들과 하는 훈련이 하나 있다. 대중문화를 통해 그 시대를 설명하고, 거꾸로 시대적 맥락을 통해 대중문화를 해석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의 마음과 공감을 산 대중문화라면 분명 당대가 공유하는 가치와 정서, 시대적 열망을 담아낸다. 대중문화와 시대는 함께 호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로 참혹한 전쟁 속 피란 인파의 처절함을 읽어내고, 영화 ‘맨발의 청춘’을 통해 현대성을 염원하는 60년대 젊은이들의 욕망을 읽는 식이다. 또 서태지 음악의 폭발적 인기를 이해하기 위해 90년대 초 전례 없는 문화적 풍요를 불러온 문화정치적 맥락을 들여다본다.

자연스레 훗날 우리는 2020년대를 어떤 작품으로 기억할지도 고민한다. 때마침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 여러 부문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동혁 감독이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가 한국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본토 미국, 나아가 전 세계적 호응을 얻었다는 징표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우리 문화의 쾌거라 보도하고, 또 한 번 한국의 우수성을 글로벌 사회가 공인했다며 환호한다. 지난 칼럼에서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영화 ‘기생충’의 경고를 무시했던 아쉬움을 토로한 터라 이번 반응 역시 영 찜찜하다.

‘오징어 게임’으로 읽는 시대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 드라마는 사실 아주 명료한 서사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등 흥미로운 놀이와 극적 장치에 담아 시대를 그려낸다. 승자독식 구조의 잔혹함, 낙오에 대한 엄청난 공포, 낭떠러지에 몰린 인간 군상을 게임이 펼쳐지는 ‘섬 안’, 그리고 일상의 공간인 ‘섬 밖’의 유비로 보여준다. 나는 이 드라마 하이라이트가 성기훈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결말도, 1번 참가자 오일남 할아버지가 모든 것의 기획자임이 드러난 반전도 아니라고 본다. 몇 단계 게임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참가자들이 투표를 통해 게임 중단을 결정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 후, 다시 자발적으로 섬으로 돌아오겠다며 모여드는 장면이 훨씬 더 압권이다. 456억원을 얻으려 목숨을 담보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게임을 되찾게 만드는 ‘섬 밖’은 본질적으로 ‘섬 안’과 다를 게 없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결국 다시 목숨을 걸 만큼의 절박함을 재확인케 하는 사회, 생명의 부지 자체는 별 의미도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현실의 재현이다.

우리는 지금 목숨을 담보로 거액이 걸린 게임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무모함을 이해하고 또 공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 서사를 알아차리고 자기 삶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살아내야 하는 시대다. ‘오징어 게임’은 무한경쟁과 능력주의의 무도함이 너무 당연해진 시대가 만들어낸 디스토피아의 신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작년 ‘오징어 게임’이 큰 호응을 얻자 개신교의 관심은 주로 드라마 속 크리스천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 모였다. 하지만 정작 여기서 읽어야 할 건 세상이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 아닐까? 매우 근본적 차원의 변화와 변혁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절박한 요청 아닐까? ‘오징어 게임’뿐 아니라 여러 대중문화를 통해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시대적 절망과 신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교회의 관심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종교가 담당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복음은 이런 세상의 현실에 어떠한 메시지인가?’로 향해야 한다.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재현은 이런 현실에서 교회 역시 대안이 되지 못함을, 오히려 사회를 더 암울하게 만드는 주체가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아파해야 마땅하다. ‘오징어 게임’에 비친 크리스천의 부정적 모습에 한 미국인이 남긴 댓글이 자꾸 머리에 맴돈다. “우리만 그런 줄 알았네. 여기도 다르지 않구나….”

박진규(서울여대 교수·언론영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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