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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파괴 현장서 이 시대를 환기시키는 역할 하려 합니다”

이건용 작가가 지난달 23일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 전시장의 작품 앞에서 제작 당시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캔버스를 뒤에 두는 등 보지 않은 채 신체를 휘둘러 흔적을 남기는 ‘신체드로잉’ 연작으로 19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을 이끌었다. 이한형 기자


실제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 작가 제공


북극곰 사진 이미지에 그린 ‘신체드로잉 76-3-2022’(캔버스에 아크릴, 193.9×130.3㎝). 갤러리 제공


폐 종이 상자와 남은 물감을 재활용한 색상지. 작가 제공


‘이건용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리안갤러리 전시장에는 작가의 아이콘이 된 폭포 줄기 모양, 하트 모양, 나비 모양의 이른바 ‘신체드로잉(Bodyscape)’ 연작이 가득했다. 붓질에선 물감이 뚝뚝 떨어지며 에너지가 분출한다. 원로 작가 이건용(80). 그는 1970년대 이 신체드로잉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린 한국 실험 미술 시기의 대표 작가이다.

그는 보지 않고 그리는 화가다. 그게 가능한가? 궁금할 수 있겠다. 캔버스 뒤에서, 캔버스 옆에서, 혹은 캔버스를 등 뒤에 두고 붓을 든 팔을 힘차게 휘둘러 선을 긋는다. 눈이 아닌 몸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 결과가 이렇게 하트, 폭포, 둥근 달, 나비 등 근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무의식적으로 물감을 마구 뿌렸다고 하지만 폴록조차 캔버스를 보면서 그리지 않았나. 이건용은 동서양 미술사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보지 않고 그리는’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파격으로 인해 그는 70년대 실험미술의 주역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팔순이 무색하게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는 그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리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다. 새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기에 지난달 말 갤러리에서 작가를 만나 인터뷰했다. 기존 신체드로잉 연작이 나왔는데, 무언가 달라져 있다. 자세히 보니 생태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기존의 하트 모양 아래 기후 위기로 녹아내리는 빙하 위를 불안한 표정으로 걷는 북극곰 가족이 있다. 작가는 북극곰을 촬영한 사진을 캔버스에 전사(사진이나 이미지를 화면에 찍어내는 일종의 판화기법)한 뒤 신체드로잉을 한 것이다. 해양 쓰레기 더미 사진을 바탕 삼아 원색의 선들이 가로세로로 꿈틀대는 작품도 있고, 초록색 선들을 덮어 생명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눈 내리는 바다 사진을 전사한 대형 캔버스에는 금색과 초록색 물감으로 달처럼 거대한 원을 그려 넣기도 했다.

“신이 준 이 세계는 생명끼리 서로 조화로운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근대 산업화 이후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균열이 생겼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득세하면서 전지구적으로 환경 위기가 심각해졌습니다. 코로나는 극한까지 간 생태 위기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며 각성의 계기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작가는 전시 제목이 ‘재탄생(Reborn)’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코로나 위기로 극한까지 간 생태 환경에 대한 각성 촉구이자 자기 성찰이 주제인 셈이다. 작가가 사진 이미지를 캔버스 바탕에 입혀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2003)와 관련한 사진 이미지를 바탕에 깐 신체드로잉을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서 선보인 바 있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신체드로잉은 작가가 사회적 발언을 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다. 작가는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2년 뒤인 1969년 미술평론가 이복영과 함께 전위예술그룹인 ‘ST’를 만들었고 76년에 열린 ST 그룹전에 신체드로잉 연작을 선보였다. 팔에 부목을 댄 뒤 선을 긋기도 하는 등 신체에 제약을 가해 선을 그리는 신체드로잉은 숨막히는 유신체제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으로 해석이 된다.

이제 그는 신체드로잉에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는 이미지를 결합함으로써 사회 문제에 직접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신작들은 현재 살고 있는 현장을 보여주고 그 위에 나의 신체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환경과 자연의 파괴가 일어나는 현장에 이건용이 자신의 신체로 만든, 살아 있는 선을 덧입힘으로써 이 시대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제가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이 시대에 살고 있으니….”

76년 처음 선보인 신체 드로잉은 거친 합판에 매직으로 그렸다. 그 방식은 이제 합판 대신에 캔버스에, 매직 대신에 물감을 쓰는 것으로 변주됐다. 행위성보다는 회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작품 안에는 신체적 행위가 반영돼 있다. 데카르트가 강조한 이성 중심 근대 사회가 무시했던 신체에 대한 재발견이 작품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회화로서 자신의 작품이 갖는 가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 작업은 보지 않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늘 새롭습니다. 색이 어떻게 섞였는지 모른 채 캔버스 뒤에서 혹은 옆에서 물감이 묻은 붓을 휘두릅니다. 보지 않고 하는 일이라 결과를 예상하지 못합니다. 어떨 때는 색이 섞인 결과가 까무라치게 좋아 탄성을 지를 때도 있습니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보다 더 액션적인 페인팅이 제 그림입니다.”

작가는 수년전부터 신체드로잉을 한 뒤 붓에 묻은 채 남아 있는 물감을 물에 씻어서 버리지 않는다.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대신 그 물감을 종이 박스에 칠한다. 그 종이 박스조차 배달 음식이나 추석에 선물로 들어온 포장재 등 폐자재를 활용한다. 그는 “그걸 1호, 2호 등 작은 크기로 잘라서 쟁여 놓은 뒤 거기에 내가 썼던 붓에 묻은 물감을 칠한다. 그렇게 색을 칠한 종이 박스가 2000점은 될 것이다. 언젠가는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창작 결과로 생기기 마련인 환경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탄생한 종이박스 색상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오묘하다. 그를 독일의 세계적인 현대미술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90)가 제작한 ‘색상표’ 연작에 비견했다. 리히터는 산업용 페인트 색상표에서 영감을 얻어 색상표의 색상을 재현한 그림을 제작했다.

“리히터는 의도해서 색상을 만들어내지만 제 경우는 붓에 묻은 물감이 스스로 색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물인 물감이 만든 색상이 작가가 의도한 색상보다 더 오묘하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근년 들어서 그는 미술시장에서도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가 됐다. 아트페어에서는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고, 전 세계 미술계 ‘인싸’들이 모이는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중인 지난 4∼7월 베니스에서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이건용은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가 서울에 상륙해 최근에 처음 연 올해 아시아 최대 미술 장터 ‘프리즈 서울’ 기간에 한국을 찾은 주요 미술관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샌프란스코현대미술관(SF모마),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라크마),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관장과 관계자들이 개인전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내년 하반기 구겐하임미술관에서는 이건용 작가를 비롯해 김구림, 성능경, 이승택 등 70년대 전위미술을 했던 원로 4명을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이 전시는 2024년 봄에는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으로 순회한다.

이건용 작가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월남했고, 목사인 부친은 서울 제기동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지금, 나눔 정신을 실천하며 월드비전 등 기독교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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