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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붕괴는 내부로부터 시작된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다가온다. 역사상 위기가 아닐 때는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한결 급박해 보인다. 세계 경기둔화와 공급망 불안으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고, 고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서민들의 삶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선망과 원망이 그 틈을 파고들며 세력을 과시한다. 기쁨과 감사의 영토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경제보다 더 급박한 것은 기후 위기이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징조는 오래전부터 나타났지만, 사람들은 물끄러미 그런 현실을 바라볼 뿐 그게 자기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했다. 그런 무관심의 이면에는, 인류가 그간 수없이 많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때마다 그 상황을 극복해왔다는 이상한 낙관론이 자리하고 있다. 낙관론에 기댄 무관심이 우리 모두의 고향인 지구를 아주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다. 큰비가 내리고 물살이 거세지고, 제방이 터질 위험이 닥쳐오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가 제방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 문을 닫아걸고 앉아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아무런 위험도 내게 닥칠 수 없다고 장담해봐야 소용이 없다. 기후가 붕괴하면 아무도 무고할 수 없다.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함께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헤롯 왕가의 마지막 왕인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아주 무능한 왕이었다. 그는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독립을 꿈꾸는 유대인들의 열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로마는 강력한 국가이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 권력의 그늘 아래서 생존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백성들을 설득하려 했다. 로마의 군단을 상대할 군사력도 없고, 전쟁을 수행할 재정적 여력도 없고, 도움을 청할 외국 군대도 없다는 그의 말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유대인들의 돌팔매였을 뿐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로마는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러나 공격을 서둘지는 않았다. 무리하게 성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주민들의 불화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재촉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측은 현실이 됐다. 열혈당원들은 자기들 입장에 동조하기를 거절하는 상류층 인사들을 살해했다. 살해당한 이들 가운데는 대제사장들도 있었다. 로마군이 포위하고 있는 동안 굶주림, 절망, 굴욕감이라는 더 강력한 적이 주민들을 괴롭혔다. 증오와 원망과 적대감이 유대인들을 갈라놓았다. 그런 위기에서도 아그립바 2세와 그의 가족들은 호사스러운 삶을 추구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됐고 성전도 무너졌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운명의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안전하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 무너짐의 참상은 엄청나다. 고야의 그림 ‘개’가 떠오른다. 흐르는 모래에 빠진 개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볼 뿐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욕망의 모래 위에 세운 우리 삶이 위기에 처했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무너뜨린 것은 로마 군대지만, 예루살렘 주민들이 서로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슴없이 폭력을 사용할 때부터 내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이다. 위기의 징후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교회의 역할 또한 다르지 않건만 경제와 기후 위기가 퍼펙트 스톰처럼 닥쳐오는 현실 속에서 오늘의 교회는 여전히 작은 문제만 버르집으며 기력을 소진하고 있지는 않은가. 역사에 대한 큰 비전을 잃는 순간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다.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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