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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포도주와 진수식



포도주는 예수와 관련이 깊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갔다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이적을 베풀었다. 성만찬은 개신교, 구교 할 것 없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해 행하는 의식인데 예수의 몸에 비유하는 빵과 함께 포도주가 등장한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들고 “이는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신 데 따른 것이다. 가톨릭은 기념 차원을 넘어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의 몸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고집한다. 중세엔 빵만 주고 포도주를 뺐는데, 신자들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포도주를 흘리는 일이 빈번해지자 거룩한 피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차원이었다고 한다. 영국의 청교도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포도주가 교회 밖에서 희생의 대용물로 사용되는 예는 새로 만든 배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진수식(進水式)에서 볼 수 있다. 고대 바이킹들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진정시킨다며 제물로 노예를 바쳤으나, 18세기 서유럽에선 포도주로 갈음했다. 오늘날엔 포도주나 샴페인 병을 깨트린다. 특징은 이를 행하는 사람이 무조건 진수식에 참석한 VIP의 딸이나 부인 등 여성이라는 점이다. 갓난아기의 탯줄을 상징하는 진수줄도 함께 절단한다 해서 대모 또는 후원자라 부른다. 포도주병이 잘 깨지지 않으면 배의 생애가 순탄치 않다는 징크스도 있다. 1912년 첫 항해에서 침몰한 타이태닉호가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최초 원자력 잠수함 K-19 진수식에선 남성 제독이 나섰다가 격파에 실패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미국 원자력 잠수함과 충돌해 방사선 피폭을 당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육영수 여사를 시작으로 대통령 부인들이 대모로 나섰다. 28일 진행된 해군의 차기 이지스 구축함 정조대왕함 진수식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황금 도끼를 들고 진수줄을 직접 절단했다. 이어 가위로 테이프를 잘라 샴페인 병을 선체에 ‘무사히’ 깨뜨렸다.

이동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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