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시사  >  월드

[전웅빈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낙태·기후변화·총기… 대법원이 가속화 한 美 ‘이념 양극화’

미국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낙태 찬성론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팻말에는 ‘우리의 권리와 자유는 어디에’라고 적혀 있다. 이날 미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다. 이 판결 이후 미국은 이념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에서 이념적 양극화에 따른 사회 갈등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고 사법기관인 연방대법원에 대한 신뢰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대법원 결정에 대한 주정부의 반발도 표면화되고 있다. 대법관을 직접 겨냥한 공세도 확산하고 있다. 이념 갈등으로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 최악의 갈등상태라는 평가도 나왔다.

갈등 근원지 된 대법원

“지난 5월부터 판사 자택에서 시위와 위협적 활동이 증가했다. 몇 주 동안 대규모 시위대가 메릴랜드의 판사 집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나팔을 불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이는 메릴랜드와 몽고메리 카운티 법률이 금지하는 행위다.”

대법원 최고 보안책임자 게일 컬리는 지난 1일(현지시간)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에게 집회금지 조치를 해 달라며 이 같은 서한을 보냈다. 메릴랜드 주법은 집에서 평온을 누릴 권리를 방해하는 방식의 집회를 열면 최대 90일의 징역 또는 1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한다. 컬리는 글렌 영킨 버지니아 주지사에게도 같은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낙태권 옹호자들은 지난 5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는 초안이 유출된 뒤부터 존 로버츠 대법원장 등 워싱턴DC 인근에 거주하는 보수 성향 대법관 자택 앞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법망을 피하려고 집회가 아닌 행진 형태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컬리도 “75명의 시위자가 한 대법관 자택 앞에서 20~30분간 시끄럽게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 이후 다른 대법관 자택 앞으로 이동해서 시위한 뒤 다시 처음 대법관 집으로 돌아와 시위를 계속했다”고 설명했다.

니컬러스 로케(26)는 지난달 8일 메릴랜드주 몽고메리카운티에 있는 브랫 캐버노 대법관 자택 주변에 총을 들고 찾아갔다가 체포돼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낙태 결정에 대한 대법원 판단에 화가 났다고 진술했다.

보수 성향의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탄핵 요구까지 받고 있다. 미국 인터넷 청원 사이트 ‘무브온’에 올라온 토머스 대법관 탄핵 청원 서명자는 3일 현재 90만명을 넘어섰다. 낙태권 폐기 판결 이후 최근 7일 동안 70만명 이상의 서명자가 몰렸다. 토머스 대법관은 낙태 판례를 뒤집으면서 보충 의견으로 피임, 동성애, 동성혼 등을 보장한 판례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었다.

민주당 우세지역 주정부는 대법원 결정에 직접 반기를 드는 정책을 마련 중이다. 뉴욕 주의회는 전날 정부청사나 의료·종교시설, 공원. 학교, 지하철 등 인파가 몰리는 공공장소를 총기 휴대 금지구역으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 연방대법원이 공공장소에서 권총을 휴대할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주정부 차원에서 대놓고 반발한 것이다. 뉴욕 주의회는 낙태권과 피임권을 주헌법에 명문화하는 평등권 수정안 안건도 통과시켰다.

버지니아주와 메인주는 탄소배출 규제 방안을 공동으로 만들기로 했다. 캘리포니아주와 오리건주, 워싱턴주는 배기가스 제로 자동차와 청정연료 기준을 만들기 위해 ‘태평양연안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대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갤럽은 최근 “대법원에 대한 미국 시민의 신뢰도가 25%로 1년 전(36%)보다 11% 포인트 하락했다”며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라고 밝혔다. 민주당 지지자는 13%만 대법원을 신뢰한다고 답했다. 1년 전보다 17% 포인트나 낮아졌다. 무당파 응답자 사이에서도 대법원에 대한 신뢰는 25%에 그쳤다. 1년 전보다 15% 포인트 줄었다.

남북전쟁 이후 최악의 갈등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은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거울처럼 서로 닮은 영역이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반대 정당 구성원에 대한 경멸이다.”

미 시카고대 정치연구소는 지난주 ‘우리의 불안정한 민주주의’라는 여론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며 이 같은 평가를 했다. 이번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 74%, 공화당 지지자 73%는 서로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반대편에 강요하는 불량배’라고 묘사했다. 응답자 대다수는 ‘상대편이 퍼뜨리는 정보는 진실이 아닌 가짜’라고 여겼다.

응답자의 절반(49%)은 정치 성향을 모르는 사람과는 정치적 토론을 피한다고 답했다. 미국인 4명 중 1명꼴로 정치적 문제 때문에 친구를 잃었다고 답했다. 정치 때문에 친척과 멀어졌다는 응답자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불매에 나선 사람들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여론조사기관은 “당파적 태도로 인한 극심한 분열이 전국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냉혹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극단적인 당파적 양극화와 서로에 대한 이격(離隔)이 미국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의미다.

뉴욕타임스(NYT)는 “낙태, 기후변화, 총기 등 여러 사안을 놓고 2개의 미국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당파에 따른 국가적 분열이 대법원에 의해 가속화됐다”고 지적했다. NYT는 미국을 합중국(the United States)이 아닌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으로 부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