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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은혜씨를 응원하며



TV를 사랑하는 ‘테순이’를 주말마다 울리고 웃겼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막을 내렸다. 노희경 작가의 극본은 말할 것도 없고 김혜자 고두심 이병헌 신민아 한지민 김우빈 등 쟁쟁한 스타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는 단연 다운증후군을 가진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씨일 것이다.

지난주 국민일보 1면을 장식한 인터뷰의 주인공인 은혜씨를 20여년 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은혜씨의 어머니인 만화가 장차현실씨가 국민일보에 ‘현실을 봐’라는 만평을 연재했고, 국민일보에 들를 때마다 은혜씨와 동행했다. 그 인연으로 이들 모녀에 대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은혜씨는 그때도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들고 오곤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매회 곱씹게 되는 대사가 있었다. 은혜씨가 출연한 회에서는 배우 김우빈의 대사에 공감했다. 극 중 연인인 영옥(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정은혜)를 만나고 얼어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그는 “내가 영희 누나 보고 놀랐어.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있죠. 다운증후군을 처음 봤어요. 그게 잘못됐다면 미안해요.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했다.

다운증후군은 800명에 1명꼴로 생긴다는데 지금껏 얼굴을 마주한 건 은혜씨가 유일했다. 20여년 전 그때, 자연스럽게 은혜씨를 대하는 척했지만 걸을 때 오른손이 오른발과 함께 나가는 것처럼 어색하고 뻣뻣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그걸 은혜씨와 현실씨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런 대사도 나왔다. “왜 사람들이 영희 같은 애를 길거리에서 흔하게 못 보는지 알아? 나처럼 다른 장애인 가족들도 영희 같은 애를 대부분 시설로 보냈으니까.” 10여년 전 영국에 1년간 머물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마트에서도 학교에서도 광장에서도 장애인과 노인들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씽씽 달렸다. 서울에서 평생 마주쳤던 장애인보다 런던에서 일주일 동안 부딪힌 장애인 숫자가 더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장애학의 도전’을 쓴 김도현씨의 칼럼에는 한국 전체 인구 중 장애인 비율이 5.4%인데 비해 영국은 27.3%나 된다는 대목이 있다. 영국이 특별히 장애인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한국이 특별히 장애인이 적은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역시 24.5%다. 한국의 장애인 비율이 이들의 4분의 1도 안 되는 이유를 ‘장애가 무엇인지는 국가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에 달려 있다’는 영국 장애학자의 말로 설명했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인정받고 살아가려면 4배는 더 힘들다는 뜻으로 읽혔다.

사진 속 ‘은혜 엄마’ 현실씨는 까까머리였다. 지난 4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삭발을 했다. 현실씨 사진을 보고 이달 초 홀로 20대 발달장애 형제를 키우던 아버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며, 부모가 장애 자녀의 삶을 끊은 사건이 지난달에만 4건, 그런 죽음이 지난 3년 동안 알려진 것만 23건이라는 기사를 천천히 읽어봤다. 현실씨는 “(드라마 이후) 부모들이 사회로 나와 싸우면서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했다. 은혜씨가 장애인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를 열어놓은 셈이다.

다음 주에는 은혜씨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개봉한다. 영화 예고편에서 은혜씨는 “그림을 그리는데 실력이 늘고, 더 늘고, 더어 더어어 늘고, 이렇게 2000명을 그렸죠”라면서 “골치 아파요~ 그놈의 인기가!”라고 유쾌하게 말한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을 일이 생겼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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