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톡!] 평화 옹호하고 전쟁 종식 촉구해야 할 종교 지도자가 ‘정교 유착의 끝판왕’이라니…

키릴(왼쪽)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원한 명단(일명 ‘블랙리스트’) 초안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는 보도에 설마했습니다. 유럽연합(EU)이 자산동결 같은 제재를 부과할 대상자 초안에도 그의 이름이 포함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대단한 전쟁광 아닐까 싶지만, 주인공은 1억명의 신자를 둔 러시아정교회 수장 키릴 총대주교입니다.

제재안이 통과되려면 EU 27개 회원국 정부의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키릴 주교에 대한 개인 제재가 실제 이행될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옹호하고 전쟁 종식을 촉구해야 할 한 국가의 종교 지도자가 테러리스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현실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키릴 주교의 행태가 어느 정도였길래 제재 방침까지 거론되는 것일까요. 일례로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상황에서 ‘신은 러시아편’이라며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자행한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모른 체했습니다. 오히려 설교를 통해 “러시아는 누구도 공격한 적이 없다”는 근거 없는 메시지로 호도했습니다. 오죽하면 80대 중반의 프란치스코 로마가톨릭 교황이 그와 러시아 정교회를 향해 “푸틴의 복사 노릇을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복사(服事)’는 사제의 미사 집전을 돕는 아이를 말합니다. 언론은 그를 향해 ‘푸틴 욕망의 동반자’라며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키릴 주교의 이해하기 힘든 행태엔 러시아정교회의 역사적 배경도 무관치 않습니다. 러시아정교회는 제정 시대에는 황제에게, 공산정권 아래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해 왔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싱크탱크인 종교·민주주의연구소 마크 툴리 소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러시아정교회는 거의 항상 국가에 종속된 민족주의자 같았다. 구소련이 종교를 말살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러시아정교회는 정치적 유용성을 인정받았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살아남고자 정권에 대한 충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탄압은 피하고 특권에 취하다 보니 종교 본연의 사명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요.

설상가상으로 키릴 주교는 40억~50억 달러의 재산을 갖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3만 달러짜리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가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정교 유착의 ‘끝판왕’처럼 비치는 그에게서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기대하거나 정의와 공의를 찾는 일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립니다.

수백 년 전 환란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동슬라브족의 복음화를 일궈 왔던 믿음의 선진들은 작금의 세태를 마주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10일은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인데 마침 이런 성경 구절을 찾았습니다. “권력가들을 믿지 말아라.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시 146:3·공동번역)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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