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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코로나 사망자 ‘헤아리기’



배우들이 합창에 도전하는 TV 프로그램 ‘뜨거운 싱어즈’에서 김영옥씨가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른 장면은 앞으로 오래 기억될 대중문화 신이 될 듯하다. 80대 중반의 노배우가 돌다리 건너듯 조심스레 불러 내려간 노래는 현장의 후배들과 음악감독들뿐 아니라 많은 시청자를 울렸다. 애초부터 가창력 덕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떨리는 음성으로 연극 대사처럼 담담히 읊조린 노랫말이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후배들의 기립박수와 찬사에 겸연쩍어하며 배우는 덧붙인다. “먼저 간 가족이 있으니까. 사람이 그렇지, 뭐. 살면서 우여곡절이 있고, 별의별 일이 다 많으니까….” 몇 해 전 방송을 통해 알려진 개인사와 겹치면서 울림은 더 깊어진다. 노래하는 이의 절절한 속내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얼마 안 남은 미래도 상상을 해보고 내 주위에 먼저 간 사람들도 생각하면서. 이게 슬픔을 자극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위로하는 음악 같아.”

대중문화가 전하는 감동은 때론 인간의 근원적 질문과의 대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실존적 한계를 절감하는 건 결국 질병과 죽음 앞에서다. 살아남은 이들이 죽음의 의미를 직면하는 장례 의식을 종교인에게 맡기는 이유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가장 종교적이기 때문일 테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상실이 가져오는 슬픔과 고통에 대한 진중한 위로. 감동의 정체는 여기에 있었다.

대중문화의 감동은 사회가 처한 집단적 상황의 부산물이다. 이 장면이 방송된 3월 중순은 오미크론의 급격한 확산으로 사망자가 하루 300~400명대를 이어가던 정점의 시간이었다. 작년 12월 한 달 사망자가 처음으로 1000명을 넘어서더니 3월 8172명, 4월 6564명으로 누적 사망의 3분의 2가 이 두 달에 집중됐다. 화장시설의 포화로 장례마저 며칠씩 지연되는 일까지 곳곳에서 벌어졌다. 누구도 나서서 그 안타까운 상실과 허망함을 위로하지 못할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코로나 사망자는 숫자 이상의 의미를 잃었다. 확진자, 위중증 환자와 함께 매일 감염 확산의 위험도를 증명하는 표식으로 전락했다. 무려 2만3000명을 넘은 생때같은 ‘사람’과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낮은 치명률이란 핑곗거리에 속절없이 묻혀 버렸다. 얼마 전까지도 확진자의 사망에는 임종은커녕 24시간 내 화장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도와 추모의 시공간조차 박탈된 채 도망치듯 ‘처리’해 버려야만 하는 ‘일’이었다. 백신 이상반응 사망자는 또 어떠한가. 4월 28일 현재 질병관리청 통계로만 1570명이다. 유족은 사별의 슬픔에 더해 인과성 입증 투쟁이라는 고통을 치러야만 한다.

인류 역사에서 감염병은 언제나 죽음의 의미,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의 죽음은 620만명을 넘었다. 재작년 초 미국 뉴욕의 ‘묘지섬’이라 불리는 곳에 수많은 관이 한꺼번에 매장되던 이미지의 충격은 여전히 선명하다. 21세기 첫 팬데믹의 유산을 차분히 정리해야 할 지금, 이 기간의 교훈 하나만 꼽으라면 누구라도 생명의 존귀함을 들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는 코로나 속 죽음을 헤아려야 한다. 머릿수를 세는 헤아림이 아닌 아픔을 짐작하여 가늠하는 헤아림 말이다. 숫자에 묻힌 사람을 되찾아 그 이야기를 정성스레 풀어내자는 것이다. 죽음에 진지하다는 건 곧 생명에 최선을 다한다는 표현이다. 모든 생명의 귀중함과 존엄성을 지키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겠다는 다짐이다. 정부가, 시민사회가, 종교가 해야 마땅한 일이다.

박진규(서울여대 교수·언론영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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