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영성 작가] 진리는 곁에 있었건만 먼길을 돌고 돌아 의심의 벽을 깨고 영원 향한 길에 서다















독일의 헤르만 헤세(1877~1962·아래 사진)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시, 인간의 내면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소설로 한국인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아온 작가이다.

헤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 그의 종교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년 이상 경건주의적 혈통이 이어져 내려온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지낸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친척이 목사였다. 그는 가족들을 ‘국제적인 선교인 공동체’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 가치관이 삶을 지배했다. 그러나 헤세는 이런 가풍 속에 때론 도망가고 싶었다. “내 부모님은 독실한 신자였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했는데, 만약 너무 어린 시절부터 네 번째 계명을 주입 당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훨씬 더 많이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양처럼 순하고 비누 거품처럼 여린 성품이었는데도, 유독 계명의 가르침에 대해서만은 완강하게 반항하곤 했다.”(산문 ‘짧게 쓴 자서전’ 중에서)
 
실존의 수레바퀴를 밀다

헤세가 부모와 갈등을 빚은 것은 교육 문제와 신앙 문제였다. 목사인 아버지는 아들을 경건과 신앙의 잣대로 훈육하려 했고, 문학이나 예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헤세는 부친의 소망대로 15세 때 목사가 되기 위해 명문 마울브론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경건하지만 엄격하고 숨 막히는 수도원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6개월도 못 돼 도망쳐 나왔다. 그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작가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그런 갈등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관심 없어요. 엄마의 그런 강요와 설교로 제가 엄마의 신앙처럼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허무주의자 헤세로부터.” 헤세가 신학교를 자퇴한 후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 내용이다.

신학교를 그만둔 헤세는 칼프에 있는 시계탑 공장의 직공과 튀빙겐에 있는 서점의 수습공으로 일했다. 작가로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재충전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여러 해 동안 거부했던 성경을 한 장씩 읽었다. 비로소 말씀이, 햇볕이 내리쬐는 것처럼 새롭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19세였던 1896년쯤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하나의 신을 찾지 못했다”고 부모에게 고백했으나 이 시기에는 신학 토론클럽에서 열띤 논쟁에 가담하기도 했고 바흐의 마태 및 요한 수난곡을 즐겨 들으며 종교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헤세는 22세 때 그동안 써온 시를 묶어 ‘낭만의 노래’라는 시집을 출간하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발간한 시집 ‘한밤중의 한 시간’은 릴케로부터 호평을 받아 문단의 관심을 끌었다. 그가 문필가로서 견고한 위치를 갖게 한 작품은 ‘페터 카멘친트’(1904)이다. 이 작품 발표 후 은둔생활을 하며 창작에 열중한다. 이때 마울브론신학교와 수습공 시절의 체험으로 장편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1906)를 완성한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부모의 이기적인 명예욕 때문에 신학교 입학을 강요당한다. 그릇된 교육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지내던 그는 지옥과 같은 학교생활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다. 자살을 기도하나 겨우 다시 살아나 시계공장의 수습공이 되고 시계탑의 톱니바퀴를 닦으며 재생하는 듯했지만 우연한 일로 익사하고 만다. 십대의 비극을 묘사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죽는 결말을 제외하고 헤세의 소년 시절과 흡사하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데미안’(1919)은 두 개의 상반된 세계를 가지고 괴로워하는 에밀 싱클레어라는 청년의 수기 형식 소설이다. 에밀 싱클레어는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와 교회는 그를 불안과 죄책감에서 건져주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준 인물은 친구 데미안의 메시지였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그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알을 뚫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데미안’ 중)

싱클레어에게 상징적으로 제시된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이 믿었던 단순한 신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헤세는 작품을 통해 마치 새가 알껍데기를 깨고 날아가듯이 기독교 신앙의 부서진 한계를 뚫고 날아올라 가길 원했다. 또 당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청년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소설 ‘데미안’은 패전의 허탈과 혼미에 빠져있던 독일 젊은이들에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폰타네문학상을 받았다. 또 헤세는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고 할 수 있는 ‘유리알 유희’로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세는 화가로도 성공했으며, 3000점 이상의 수채화를 남겼다.
 
일평생 기다린 하나님

그는 일평생 자신에게 올지도 모를 종교를 찾았다. 알짜배기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거기에서 제시된 신과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세는 50세쯤 여러 글과 개인적 편지들을 통해 새삼 자신이 개신교도라는 정체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요약된 이력서’(1927)에서 그는 “나는 우연하게도 경건한 신교도의 아들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질적으로나 천성적으로 개신교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 시들을 통해서도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숙고’(1933) ‘구세주’(1940)에서 드러난다.

그가 56세 때 쓴 시 ‘숙고’에서 자신에게 흐르는 기독교 혈통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영원한 자가 특별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즉 기독교적 관점의 아가페 사랑을 연상시킨다. “떨리는 영혼인 인간은 주저한다/다른 존재와는 달리 고통의 능력과 최고의 능력/믿음과 소망의 사랑을 가진 채… 우리는 느낀다. 그를, 위험에 빠진 사람을/영원한 자가 특별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을…”(시 ‘숙고’ 중)

63세 성탄절에 쓴 ‘구세주’란 시는 젊은 날 그가 기독교에 대해 반항적이었던 태도와 매우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관계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속적이며 역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매번 다시 그는 외로이 일어나야만 하고/모든 형제의 고통과 동경을 짊어져야만 하며/항상 그는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매번 다시 하나님은 예고하려 하고/천국의 것은 죄인들의 계곡 속으로/정신은, 영원한 것은 육체 속으로 스며들고자 한다.”(시 ‘구세주’ 중)

정경량 목원대 명예교수의 논문 ‘헤르만 헤세와 기독교’에 의하면 헤세가 73세가 된 1950년 나이 든 여성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제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자라났지만, 그다음에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그리스도 없이 저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추측하시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번 그리스도에게도 되돌아갔습니다”라고 썼다. 또 헤세가 86세로 세상을 떠난 1962년엔 둘째 아들 브루노에게 “이제 늙은 나이에 오히려 기독교에 다시금 더욱 가까워졌다”라고 말했다. 헤세 연구가들은 청소년기에 기독교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은 헤세가 노년에 이르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됐다고 본다.

헤세는 부모의 경건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항으로 청소년기에 신앙을 멀리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아 거꾸로 자기 종교의 뿌리인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 중국의 문명비평가 린위탕(임어당)처럼 기독교는 그에게 출발 지점이 아니라 오랜 추구 끝에 도달한 목적지였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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