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고싶은 설교]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사람들







팔복의 세 번째 가르침은 온유한 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났다가 아무런 의미없이 살다가 죽는 존재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으시며 우리에게 주실 놀라운 복을 이미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성경은 그 복을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표현합니다.

팔복의 세 번째 말씀은 바로 이 기업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성도들에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 위해 준비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계시록 21장은 하나님께서 주실 기업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7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또 요한복음 14장 2절은 그 기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때문에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실망도 염려도 없고 두려움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단지 미래적인 측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의 삶에 실제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에게 땅을 빼앗긴 속국이었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제국보다 더 강한 군사력과 정치력만이 해결책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는 세상에서 말하는 착하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유약해보이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유는 겸손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영적인 겸손을 뜻합니다. 즉 세상에서 착하게 태어난 온유한 성품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의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서 부드러운 마음, 신앙적인 온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시편 37편 11절에도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그런데 9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표현은 동일한데 9절은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이 받는다고 되어 있는 반면 11절은 온유한 자가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가 온유한 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소망한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대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기대하며 기다릴 때 빚어지는 성품, 그것이 온유입니다. 나의 힘으로 감정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 위에서 하나님의 때를 간절히 기다릴 때 빚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온유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빚어주시는 성품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서 온유를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스겔 36장 26절에서 에스겔 선지자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의 120년 생애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살던 40년 동안 그는 혈기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때, 실제로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혈기를 땅에 묻어두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아직 온유의 성품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진정 온유한 삶을 살았던 때는 출애굽 이후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40년 기간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수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 속에서 심지어 아론과 미리암이 자기를 공격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시편 37편을 쓴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이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내가 나를 통제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온유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온유합니까?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온유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온유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오래 참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얼마나 온유한 모습으로 사랑의 모습으로 서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9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쉼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역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기도 하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분노를 드러내시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갖 고난과 조롱을 당하시면서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죽어가시면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온유한 자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땅의 기업들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황덕영 목사
새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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