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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강렬한 감정 겪고도 하지 못한 말, 누구나 있죠”

윤가은 감독이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마음산책 사옥에서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2018년 영화 ‘우리집’ 촬영 현장에서 주인공 하나 역을 맡은 배우 김나연과 이야기하는 윤 감독(오른쪽). 윤가은 감독 제공


산문집 ‘호호호’의 표지.


영화감독 윤가은(40)은 영화 말고도 좋아하는 게 많다. 오래된 문방구에서 찾을 수 있는 옛 문구와 완구, 걷기, 일요일 아침에 하는 청소, 꽃, 생일, 노래방, 만화책, 빵, 여름, 별자리 운세, 조카….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의 이야기를 모아 지난 2월 산문집 ‘호호호’를 펴냈다.

서울 마포구 출판사 마음산책 회의실에서 지난 15일 윤 감독을 만났다. 한쪽 통유리벽으로 작은 정원과 하얀 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파란 하늘 아래 아담한 옥상이 나왔다. 그의 영화에 나올 법한 공간이었다. 다음 영화를 준비하는 회의가 조금 늦게 끝나 서둘러 왔다며, 그는 밝고 수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윤 감독은 ‘손님’(2011) ‘콩나물’(2013) ‘우리들’(2016) ‘우리집’(2019) 등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줄곧 찍어왔다. 이들 작품은 그에게 제34회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부문 대상, 제6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부문 K플러스 단편영화상,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등을 안겨줬다.

아이들이 좋아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는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도 아니고, 어떤 사명감이 있어서도 아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다가 그런 주제가 제 안에 있다는 걸 발견했다”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윤 감독은 “영화감독이 되기 전 방황할 때가 있었는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처럼 내로라하는 분들이 엄청 재밌는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많이 풀어내던 시절이었다”며 “그런 이야기가 저한테선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좌절과 자책이 컸지만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다”고 돌이켰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그의 고민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보자’라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오래전부터 성장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좋아했다. 커스틴 던스트 주연의 ‘브링잇온’과 차인표가 나온 ‘짱’, 이준익 감독의 ‘키드캅’ 등이다. 하지만 어린이가 주인공인 가족 영화는 거의 나오지 않던 시기였다. 윤 감독은 “더이상 시장이 없는데 그런 이야길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에 단편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화자가 어린이인 윤 감독의 영화에 성인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건 누구나 가진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는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사건이 있어도 상황을 객관화하기 어렵다. 지식도 경험도 없는 어린이로서 돌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지 못한 말이 속에 남는다”며 “이제는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생겼기에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못다 한 내 이야기를 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윤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주인공인 아이들의 모습과 감정이 귀엽고 안타깝다. 영화 속 어른들의 대사는 생각할 거리를 준다. ‘우리들’에서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담임선생님은 “4학년 여름방학이 제일 중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우리집’에서 5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은 “너희들 5학년 여름방학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라고 말한다. 의도가 있는 대사일까.

그는 “일부러 넣은 대사다. 발견한 관객이 있다니 정말 반갑다”며 “선생님의 레퍼토리이기도 하고 두 영화가 연결될 수 있다는 느낌을 주려는 의도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당면한 문제가 나한테 가장 소중한 문제이고, 지금 나한테 다가왔을 때는 우주”라면서 “그런 차원에서 매 순간이 가장 중요한 여름방학이란 생각을 늘 한다”고 했다.

아역 배우들과 작업하다 보니 배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감동도 있다. ‘콩나물’에서 시장을 찾아 종일 돌아다니던 7살짜리 꼬마 보리(김수안)는 영화 ‘부산행’ ‘군함도’ ‘신과 함께-죄와 벌’ 등에서 활약하며 존재감을 보여줬다. 윤 감독은 “스태프들과 ‘저 배우들 저렇게 크게 성장할 동안 우린 뭐했나’ 하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며 “현장에서도 어린 배우들은 생각이 열려있다. 편견을 깨는 공부를 하며 반성하고 자극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호호호’는 영화를 만들다가 지쳤던 그에게 치유를 선물했다. ‘윤가은은 호불호(好不好)가 아니라 호호호(好好好)가 있다’는 의미에서 지은 제목이다. 두 번째 작품을 끝내고 번아웃을 겪던 2020년 친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견디기 힘들었다.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 듯한 날들이었다.

윤 감독은 “좋아하는 것들을 끄집어내 기록해 두면 마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며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는 취향, 이제 만날 수 없게 된 친구와 늘 이야기하던 ‘좋아하는 것들’을 글로 쓰게 됐다”고 털어놨다.

책을 쓰면서 영화에 대한 애정도 다시금 깨달았다. 윤 감독은 “영화 얘기는 쓸 생각이 없었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안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쓰다 보니까 계속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놀랐다. ‘아직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게 많지만, 정말 싫어하는 것 한 가지를 꼽는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윤 감독은 망설임 없이 “노키즈존”이라고 답했다. 그는 제주도에 사는 조카와 함께 여러 차례 문전박대 당한 이야기를 했다.

“성인도 부주의할 때가 있고 매너가 없는 성인도 많다. 아이들은 모르고 실수하는 것”이라며 “노키즈존은 소수와 약자에 대한 혐오와 소외를 기반으로 한, 굉장히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인권적인 개념”이라고 윤 감독은 비판했다. 이어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생각하기가 복잡하니까 너무 쉽게 혐오하는 대상을 만들어버린, 기본값이 다른 사고”라며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보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윤 감독은 앞으로도 어린이와 함께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이야깃거리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할 얘기가 많아서 시작도 안한 느낌이지만, 내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나이를 먹으면서 날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의 생생함으로부터 멀어지는 중이고, 어린 배우들이 날 언제까지 받아줄까 하는 고민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감각과 노력이 닿는 한 할머니가 돼도 어린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인터뷰 말미에 서울 어느 곳에 폐업 정리 중인 문방구가 있다고 귀띔하자 윤 감독은 가방에서 수첩을 찾아 급히 메모했다. 그는 “폐업 정리는 오래 하지 않기 때문에 내일 당장 가야 한다. 책을 통해 취향이 알려지니 제보를 받을 수 있어 좋다”며 자신의 만든 영화 속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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