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기자의 안녕, 나사로] ‘육아빠’는 나사로가 필요해

부모의 손가락을 꼭 붙들고 있는 아기의 손. 육아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픽사베이




성경엔 두 대상을 대조해가며 ‘차별 대우’한 기록이 있다. 바로 부자와 거지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봤을 때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차별은 그 이름을 독자에게 알리지 않는 것 아닐까. 성경은 돈과 권력을 쥐고 호화롭게 인생을 소비한 부자를 그저 ‘한 부자’라고 기록한다. 대신 가진 것 없이 대문 밖에 버려졌던 거지에겐 ‘나사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 이름에 담긴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이 도우신 자’다.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것 같던 부자는 하나님의 기억에 없었지만, 세상의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어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던 거지는 나사로란 이름으로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2021년 한 해를 육아휴직 기간으로 보내며 ‘육아빠(육아하는 아빠)’로 살아본 기자가 얻은 깨달음은 이 시대의 부모와 아이 모두 ‘나사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것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아이는 태어남(B)과 동시에 자신의 선택(C)을 두고 부모와 죽도록(D) 충돌하며 살아간다. 먹는 것과 자는 것 등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조차 강렬하게 거부하는 아이를 맞닥뜨리는 순간 부모는 소위 ‘멘붕’에 빠진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씻기, 옷 입기, 예절 지키기, 공부하기 등 난관은 다양해지고 난이도는 높아진다.

대개의 경우 부모는 자기 경험의 산물들을 무기 삼아 아이의 선택에 제동을 걸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경험치가 부족한 아이들은 불리한 논쟁에서 양육자에게 설득을 당하거나 논리에 벗어난 주장을 펼치며 떼를 쓰다 인정하기 싫은 패배를 맞닥뜨린다. 부모들은 미성숙한 아이의 그릇된 판단을 ‘바른길’로 이끌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자문해야 할 게 있다. ‘양육자가 바른길이라 여기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만이 자녀에게 유익할까.’

질문의 출발점은 ‘경험’이란 바구니가 성공적인 것으로만 가득 차 있기보다 실패 아픔 등과 어우러져 있을 때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있다. 문제는 양육자가 ‘빠른 길’을 바른길로 착각할 때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선 목적지를 향해 조금 돌아가거나 느린 걸음으로 가는 게 불가능하다.

과연 시행착오를 모조리 ‘패싱’해가며 자녀를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로켓배송’해주는 게 바람직한 양육일까. 아이의 주장과 선택이 사회적 통념을 벗어날 만큼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한 걸음 물러나 이를 존중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아이의 선택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경청하는 일이다.

아이가 적잖은 고민 끝에 도달한 선택지라면 양육자가 더 나은 선택지를 알고 있더라도 양보해볼 만 하다. 아이가 선택한 결과물의 효용이 작다 해도 아이는 분명 그 효용보다 더 큰 경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덤으로 얻는 것들도 있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 양육자에게 제안하기까지 필요한 용기, 실험정신, 비교분석력 등이다. 이 정도면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훌륭한 기회비용인 셈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끄신 하나님은 블레셋 지역을 통과하는 빠른 길이 아닌 먼 홍해 길로 돌려 인도하셨다. 그 길이 고되고 더딜지라도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경험하고 홍해의 기적을 마주할 수 있는 바른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마음과 도우심으로 자기 백성을 양육한 것이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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