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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책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책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사람은 책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다 보니 70을 넘겼고, 뒤돌아보니 내가 읽은 책들이 나의 삶의 지로(指路)가 되었고,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내가 걸어가는 나그네 여정에서 등불이 되었습니다.

일전에 우리 집을 방문했던 동료가 소장한 책이 몇 권이나 되냐고 묻기에 하루를 작정하고 세어보았더니 1만6000권에 달했습니다. 제법 모았다 싶지만 육당 최남선 선생이 소장한 도서가 15만권이었다고 하니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 할까요. 육당 선생은 80년 전, 도서량이 현저하게 적었던 시기이고 보면 최남선의 소원서재(素園書齋)는 가히 한국학의 보고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춘원 이광수나 위당 정인보 같은 당대 지식인들이 드나들며 교우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책을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심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고전은 그만두고라도, 코넬리우스 반틸의 ‘신앙의 변호’를 읽은 탓에 개혁주의 신학의 진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면서 그가 서두에서 말한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는 말씀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록 말석에서라도 역사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처음으로 완독한 원어 서적이 로저 윌리엄스의 ‘교회와 국가’였는데, 이 책을 통해 종교의 자유, 관용, 정교분리 같은 근대적 자유 개념을 알게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이 나의 내면과 외면의 세상을 보게 했고,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을 갖게 한 것 같습니다.

특히 민경배 교수님의 ‘한국의 기독교회사’는 역사에 눈을 뜨게 했을 뿐 아니라 학구(學究)의 날을 인도했던 ‘내 인생의 책’이었습니다. 대구 근교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9년, 대한기독교서회가 펴낸 민경배 선생님의 ‘현대신서’ 문고판을 접했습니다. 신학도의 길을 가던 네 살 위 이만규 형님 덕분이었습니다. ‘정통종합영어’ ‘수학의 정석’을 뒤로하고 한국교회의 역사를 읽던 그때의 감동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이 제가 읽은 첫 교회사 책이었습니다.

물론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변방으로 스며드는 복음의 역사에서부터 시작되는 한국교회의 시원에 대한 기록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의 진한 감동 때문에 역사, 아니 교회사를 공부하게 됐고 그 덕분에 한국교회사를 전공하게 됐습니다. 후에는 교회사 선생이 되어 지난 35년간 대학에서 일해 왔습니다. ‘한국의 기독교회사’는 무언가 옛것에 목말라하며 연원을 추적하던 철부지 호고(好古)주의자의 역정(歷程)을 안내했으니 ‘책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상규 석좌교수(백석대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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