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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의 인사이트] 집밥해주는 대통령 보고 싶다



“난 무서운데 아닌가 봐. 내가 틀렸나 봐.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세상에서. 나중에 딴소리들 마시고요.”

역대급 비호감 선거였던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아일랜드에 사는 대학 동창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 글에는 너무 속상해서 1년 만에 술 한잔 들이켰다는 댓글과 지금껏 안 하고 버티던 미국 시민권 신청하겠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래도 양아치가 되는 것보다 낫다는 댓글도 있었다.

진영·지역·세대·젠더 갈등을 증폭시키며 나라를 분열시켰던 대선이 끝났다. 48.56% 대 47.83%. 호남 대 영남, 서울 강남권 대 비강남권. 여기에 더 보태진 현상이 이대남(20대 남성) 대 이대녀(20대 여성) 구도다. 여야 후보 득표가 1% 포인트도 안 되는 근소한 차이에 그친 것은 왜일까.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해 20여년 전 아일랜드로 넘어가 살고 있는 대학 친구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우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검찰 공화국에 대한 우려 때문일 터다. 더디더라도 한 발짝씩 나아갔던 여성 인권, 분배, 평화 공존의 가치들이 후퇴하고 가부장적 사회, 가진 자들만을 위한 성장, 불안한 안보시대로 회귀할 것이라는 걱정도 큰 몫을 한 것 같다. 여성가족부 폐지, 성범죄 무고죄 처벌 강화 등의 공약부터 “더 이상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거나 배우자 김건희씨 7시간 녹취록에 나온 안희정 사건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인식을 보면 여전히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1년 벼락치기 공부로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그를 찍지 않은 절반의 국민을 안고 가야 할 숙제가 놓여 있다.

이들을 품으려면 먼저 행동으로 보여줘라.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역사상 첫 남녀 동수 내각을 구성하면서 한 말은 “지금은 2015년이니까요”였다. 지금은 2022년이다. 윤 당선인 말대로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면 성평등 내각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핀란드 에티오피아 등의 성평등 내각은 지구촌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실력 있는 여성 인재풀이 적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했던 문재인정부에서도 안희정·박원순 등에 의한 권력형 성폭력과 피해호소인 같은 왜곡된 성인식이 만연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남녀 성별 임금 격차와 여성 고위직 비율이 최악인 나라다. 이런 구조적 성차별이 해결된다면 그때 가서 한 부처를 폐지해도 늦지 않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꿈을 주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가려면 같은 고민을 하고 해결책을 찾아갈 젊은 인재가 필요하다. 20, 30대 여성 장관을 앉혀라. 그들이 느끼는 성차별 문제를 그들의 시선으로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윤 당선인은 엘리트 강골 이미지가 강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의 일성은 ‘정직한 대통령’이 되겠다였다. 김건희씨는 결혼할 때 “(당선인이) 집밥해주겠다는 약속을 10년간 잘 지켰으니 국민과의 약속도 잘 지킬 것”이라고 했다. 선거기간 활용했던 유튜브 ‘석열이형네 밥집’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계속하면 어떨까. 보육원 출신 봅슬레이 선수와 월세를 낼 돈도 없어 생계형 차박을 하는 청년, 자영업자 등에게 미역떡국과 불고기, 각 잡은 계란말이 등을 만들어주며 고단한 삶의 얘기들을 들어주던 요리 잘하는 대통령을 계속 보고 싶다. 쇼를 할 필요는 없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저녁 퇴근길에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점심을 먹기 위해 햄버거집 앞에서 줄을 섰다. 우리도 동네 형 같은, 아저씨 같은 ‘집밥해주는 대통령’을 갖고 싶다. 구중궁궐에 앉아 혼밥을 했던 대통령이나 자기편 얘기만 들었던 반쪽짜리 대통령의 흑역사는 끝냈으면 한다. 밥은 보약이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주며 벼랑 끝으로 내몰린 민초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대통령이 됐으면 한다. 당선인 말대로 선거운동하듯 5년을 국민만 바라보고 섬기면 된다.

은둔의 퍼스트레이디도 원하지 않는다. 해외에선 여성 대통령과 여성 총리가 나오고 직업을 가진 배우자가 자기 일을 계속하는 시대다. 그림자처럼 숨어 있는 배우자가 아니라 대통령이 살피지 못하는 소외되고 그늘진 곳을 보듬고 ‘베갯머리 정치’가 아닌 ‘쓴소리’를 하는 퍼스트레이디를 보고 싶다.

이명희 종교국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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