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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입춘에서 우수로 가는 길목, 물오른 나뭇가지가 슬몃슬몃 초록빛을 내비친다. 불안과 두려움이 스멀스멀 우리 영혼을 잠식하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이 고맙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해동머리에 웃자랄지 모를 밀과 보리를 밟아주고 웃거름도 뿌려주느라 분주할 때다. 거름도 준비하고 씨앗도 골라야 한다.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며 사는 이들은 성실하다. 그 성실함이 세상을 지탱하는 토대인지도 모르겠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것 같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자연의 이법에 기댄 말이지만 실은 삶의 은유이다. 사람은 누구나 씨를 뿌리며 산다. 누군가의 가슴에 희망을 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망을 심는 이도 있다. 감사와 순수와 기쁨을 심는 이도 있지만, 원망과 오욕과 혐오를 심는 이도 있다.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쉴 때가 많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아래 엉겅퀴와 가시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조각가인 자코메티의 ‘광장’이 떠오른다. 앙상한 뼈대만으로 선 인물들이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그들은 걷고 있지만 서로를 향하지는 않는다. 불안과 외로움이 인물과 인물 사이를 채우고 있다. 볼륨을 상실한 그들의 표정조차 알 수 없다. 시인 신동엽의 말대로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보는 사람이 그립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로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 손을 잡아주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모스크바에 사람들이 ‘장군’이라 부르는 한 노인이 살았다. 그는 한평생 유형지와 감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노인은 유형수들을 만날 때마다 일일이 멈춰 서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도 훈시 따위는 하지 않았다. 노인은 모든 죄수를 ‘다정한 친구’라 불렀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돈을 주기도 하고, 생필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따금은 성경책을 가져갔다. 죄수에게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없었고, 죄수가 자기 죄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을 때만 들어 주었다. 죄수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대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유형수가 눈에 띌 때면 다가가 아기를 어루만져주고, 그 아기한테 웃어보라고 손가락을 딱딱 튀겨 보이기도 했다. 시베리아의 거의 모든 죄수가 그 장군을 기억했다. 그 가운데는 열두 명의 어른을 살해하고 여섯 명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있었다. 20년을 그곳에서 지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지금도 그 장군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마주 앉은 이에게 물었다. “그 흉악범이 20년 동안 잊지 못했던 장군 할아버지가 그자의 영혼에 어떤 씨앗을 영원히 뿌려 놓았는지 자네는 알겠는가?”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누군가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우리 개성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주는 동시에 타인의 개성 일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가 누군가의 가슴에 심어준 씨앗들은 어딘가에서 발아하여 형체를 얻고 자라고 있다. 오늘 우리의 모습 또한 누군가 우리 속에 심어준 씨앗들이 형태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수많은 말들이 오간다. 홍수에 떠밀려온 부유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이 스산하다.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춰야 한다. 어지러운 말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검질기게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푸름을 유지한다. 시인 반칠환은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라고 노래한다. 인생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두근거림을 타고 온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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