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도쿄·파리 유학파였지만 ‘토종화가’ 박수근 높이 평가

권옥연이 30대 초반에 그린 ‘양지’(1956, 캔버스에 유채, 153×193.5㎝)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 나왔다. 권옥연은 프랑스 유학 이후에는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한 이런 구상 회화에서 벗어나 회색조의 추상을 그렸다. 70년대부터는 다시 구상으로 돌아와 그의 브랜드가 된 회색 여인이 등장하는 인물화를 지속적으로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권옥연(1923∼2011)
 
왼쪽부터 ‘첼로를 켜는 여자’(1953, 캔버스에 유채, 95.5×65.5㎝), ‘목정 B’(1964, 캔버스에 유채, 130×120㎝), ‘소녀상’(1970년대, 하드보드에 유채, 25×17㎝). 국립현대미술관·가나아트·부산시립미술관 제공
 
권옥연 소장품이었다가 삼성가에 넘어간 ‘까치 호랑이’. 이건희 컬렉션에서 기증받아 국립중앙박물관의 임인년 맞이 ‘호랑이 그림Ⅰ’전에 소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권옥연(1923∼2011)은 청회색조의 몽환적인 여인 그림이 브랜드다. 1970년대 이후 작고하기까지 이런 그림으로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특히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그는 변종하 김흥수와 함께 화랑가에서 가장 이름을 날린 3대 생존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약간 들창코에 혼혈아처럼 보이는, 소녀도 여인도 아닌, 청순한 것 같으면서도 퇴폐미가 감도는 애조 띤 여성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권옥연 그림에 나오는 여자같이 생겼다”는 비유가 나돌 정도였다.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은 “워낙 작품이 잘 팔려 개인전 할 물량이 없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소녀 연작은 파리 뒷골목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도회적 세련미 덕분에 파리 유학파 1세대 권옥연의 이력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림뿐 아니라 일상의 습관도 그랬다. 기골이 장대한 북방계 호남형의 멋쟁이 권옥연은 남자면 ‘무슈’, 여자면 ‘마드모아젤’을 붙여서 불렀다. 여자를 만나면 와락 껴안고 볼을 비비는 프랑스식 인사를 했다. 파리 유학파로서 자긍심이 묻어 있는 태도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전에 전시된 권옥연의 작품은 초기작인 ‘양지’(1956년)다. “어, ‘회색 소녀’가 아니잖아.” 권옥연을 아는 관람객이라면 그림 속 여인들이 입은 원색의 의상, 건강한 구리빛 피부 때문에 이런 말을 내뱉으며 당혹스러워했을 수 있겠다. ‘양지’는 권옥연의 브랜드가 된 이국적 소녀가 등장하기 이전, 즉 파리로 유학 가기 이전의 초기 화풍을 보여준다. 해방과 함께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화가 인생을 본격적으로 출발한 30대 초반의 권옥연에게 ‘국전 세 번째 특선’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화면 속에서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서거나 앉은 여인들은 긴 머리, 거뭇한 피부, 상반신이나 미끈한 팔을 드러낸 신체 등에서 타히티 시대 고갱의 원시적 체취가 풍긴다. 후기 회화의 청회색톤과 전혀 다른 원색을 사용한 점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햇빛을 받은 산이 주는 견고함, 근경의 나무가 주는 볼륨감에서 세잔식 조형미가 감지된다. 서구 모더니즘을 학습한 작가 이력이 단박에 드러나는 작품이다.

권옥연은 1942년 도쿄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입학하며 50년대 회화 양식의 기반을 닦았다. 50년대 대표작인 양지는 이건희 컬렉션의 성격을 말해준다. 이건희 회장에게 근대 미술 작가의 작품 대부분을 추천했다는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처음부터 미술관 건립을 염두에 두고 주요 작가의 경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과거의 작품을 연대별로 모았다”고 말했다.

권옥연은 함경북도 함흥의 유서 깊은 ‘권 진사 댁’ 5대 독자로 태어났다. 권 진사 댁은 추사 김정희가 함흥에 유배 갔을 때 며칠 신세를 질 정도로 부유했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지만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운 권옥연은 음악가가 되려 했다. 할아버지의 반대로 꿈이 좌절되자 그다음 택한 것이 미술이었다. 상경해서 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에 다니며 미술부에서 활동했는데, 이때 미술교사로 있던 사토 구리오(佐藤九二男)의 영향이 컸다. 이대원 유영국 장욱진 등이 미술부 선배들이었다. 사토를 통해 권옥연은 야수파와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아방가르드 미술에 눈떴고 일본 유학을 갔다.

해방 이후에는 파리 유학파 1세대가 됐다. ‘양지’가 국전 특선을 한 이듬해인 57년 프랑스로 떠난 것이다. 훗날 연극계의 대모로 불리는 아내 이병복씨와 함께였다. 파리에 체류하던 3년간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 터져 나오고 유럽에선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치유하듯 끈적거리는 추상 회화인 앵포르멜의 열기가 휩쓸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 그런 장소에서 권옥연은 오히려 동양정신을 생각했다. ‘내가 한국을, 동양을 너무 몰랐다’고 통탄하며 근원적 기호로서 상형 문자, 갑골문자, 고향의 낡은 대문과 기와, 토기 등 동양적 요소를 접목한 독특한 추상회화를 개척했다. ‘문A’ ‘허공’ ‘절규’ ‘폐원’ ‘신화’ 등 파리 시대의 추상 회화 작품들에 대해 “기호 같은 이미지는 역사적 시공간의 흔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자신을 형성해온 과거의 따뜻한 정서와 마주하게 하는 무의식의 매개물”이라고 미술평론가 최정주씨는 해석했다. 캔버스에는 50년대의 원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근원적 향수를 건드리는 이들 작품에 대해 파리에서 만난 초현실주의 창시자 앙드레 브르통은 ‘동양적 쉬르레알리즘’이라고 평가했다.

60년 귀국한 이후 동양성을 더욱 밀어붙였다. 추상화된 작품 속 이미지는 60년대 중반부터 구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토기, 목기, 청동기, 한옥 장승 등 민속적 소재들이 등장했다. 이즈음 골동품 수집에도 빠져들기 시작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토기나 목기, 청동기 등은 다 그가 소장한 고미술 컬렉션을 소재로 그린 것이었다고 한다. 초상화, 민화, 목기 등 고미술 컬렉션은 물량뿐 아니라 수준도 대단했다. 이호재 회장은 “권옥연 컬렉션만 가지고 일본 고덴샤(講談社)에서 ‘이조 공예’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우수했다”고 했다. 조선 후기 화원 화가 이명기가 그린 보물 ‘오재순 초상’도 권옥연 컬렉션이었다. 이를 포함한 고미술 컬렉션은 상당수가 삼성가로 흘러 들어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2022 임인년 맞이 ‘호랑이 그림Ⅰ’전에 나온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품에 나왔던 ‘까치 호랑이’ 역시 한때 권옥연 소장품이었다.

이병복은 부친이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차관을 지냈다. 둘 다 부유한 양반집 출신인 부부를 두고 ‘최고 선남선녀의 만남’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씀씀이에 배포가 있었던 부부는 고미술 컬렉션만 한 게 아니라 62년부터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8000평 정도의 대지를 매입한 뒤 사라질 위기의 고택을 옮겨왔다. 영조가 막내딸 화길옹주에게 지어준 ‘궁집’을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순조의 세자인 익종의 비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집이었던 군산집, 조선 말기 친일관료 송병준의 가옥이었던 용인집, 강감찬 장군의 사당 등 전국의 고택이 해체돼 재조립됐다. 이곳은 훗날 권옥연의 호를 따 ‘무의자(無衣子)박물관’이 됐다.

권옥연은 유학파였지만, 토종 작가인 박수근을 높이 샀다. 국전 심사위원을 할 때는 박수근 그림이 국전 심사 대상에서 제외될 때마다 다시 심사를 받게 했다. 박명자 회장은 “외국물 먹지 않은 순수한 작가는 박수근뿐이라며 제일 존경하는 작가라 했다”고 회상했다. 한국적인 것에 대한 사랑을 이처럼 다양하게 표출했던 권옥연이 국적 불명의 이국적 소녀를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40년간 그렸다는 점은 아쉽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