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느헤미야처럼… 민족의 죄, 내 죄로 생각하고 회개해야

1938년 전북 군산신사 배전 앞에서 신사 종사자가 사진촬영을 했다. 배전은 신사에 배례하기 위해 본전 앞에 지은 건물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금까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살펴봤다. 그러나 의외로 이러한 신사참배 회개를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 예로 2018년 광화문에서 교계 연합기관이 신사참배 회개기도회를 개최했을 때 일부 단체는 부정적인 논평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언론을 통해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총회 석상에서 노골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면 이들이 신사참배 회개에 반대하는 근거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첫 번째는 우리가 짓지 않은 죄를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느냐는 반론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자. 성경은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레 26:40)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자신이 짓지 않은 조상의 죄악까지도 함께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실제로 구약의 의인은 그러한 기도를 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인정한 의인이었지만,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로 알고 금식하며 회개했다.(단 9장) 또 2차로 유대 땅으로 귀환한 에스라는 이방 민족들과 통혼한 죄를 회개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지었던 자기 민족의 죄를 회개하고 있다.(스 9:7) 느헤미야는 그 죄를 지었던 사람들로부터 몇 세대 뒤의 사람이지만, 그 역시 자기 민족의 죄를 위해 회개하고 있다.(느 1:5~11)

더구나 이들은 이 죄를 회개할 때 ‘저희’ 죄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 9:5)

이 사실은 자기 죄만을 위해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보여준다. 오히려 다니엘과 느헤미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일수록, 그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로 생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자세다.

두 번째는 이미 회개한 죄를 왜 또 회개해야 하는가 하는 반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를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이틀에 걸쳐서 신사참배한 죄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이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총회에서의 회개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킬 만큼 진정한 회개였을까. 또 백 보 양보해서 교회 지도자들의 회개가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교회 전체의 회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지도자들이 총회 석상에서 행한 한두 번의 회개로 7년 동안 한국교회가 그렇게 수많은 배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충분한 회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되기 직전 과거 조상의 죄를 회개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회개가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 뒤 느헤미야는 또 회개했고, 에스라 역시 또다시 회개했다. 나치의 폐해를 경험한 독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참회한다. 한두 번의 참회가 과거의 모든 것을 종결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이 왜 필요하겠는가.

세 번째는 과거의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거나 당면한 문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반론이다. 물론 지금 여러 가지 죄악들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신사참배의 죄는 지금 한국교회가 짓고 있는 죄와 차원이 다른 죄다. 지금의 죄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죄이거나 혹은 일부 교회 지도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반면 신사참배는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함께 지은 죄였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어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것에 절한 엄청난 죄다. 게다가 총회가 앞장서서 이를 교리적으로 정당화하고 반대자들을 탄압했다. 이런 죄를 지금 짓고 있는 다른 죄들과 같은 비중으로 다룰 수 없다.

네 번째는 그 시기에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도외시하고 무조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일제의 총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일제의 강요 때문에 마지못해 신사참배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사실이 그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대박해 시기에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성화에 침을 뱉고 그것을 발로 밟는 것을 배교로 여겼다. 수많은 사람이 이것을 거부하다가 순교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배도 행위다. 그 시대적 상황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상에게 절한 것이 무죄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참회를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지었던 신사참배의 배도들에 대해 변명하기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창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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