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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빛을 따라]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



엄벙덤벙 지나다 보니 벌써 1월 중순이다. 어느 때부터인지 새해 결심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자는 생각뿐이다. 시간은 늘 새롭게 다가오지만 익숙한 얼굴을 대하듯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것이 우리 버릇이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그 시간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문제는 익숙해지는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더 이상 긴장도 변화도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이다. 타성에 빠지는 순간 변화를 싫어하기 시작한다. 타성이란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을 뜻하지만, ‘게으름’ ‘소홀히 함’ ‘업신여김’이라는 뜻이 그 속에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 말이다. 교회 전통이 말하는 일곱 가지 근본적 죄 가운데 하나가 ‘나태’이다. 나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할 생각을 품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것, 시간의 권태에 떠밀리며 사는 것을 가리킨다. 나태는 선물처럼 다가오는 시간을 순식간에 낡게 만들거나 삼켜버리는 영혼의 심연이다.

소설가 줌파 라히리는 어느 날 자기가 타성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모어인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글을 써봐야겠다고 작정한다. 무모한 결심이었지만 그는 차근차근 이탈리아어를 배워 나갔다. 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을 호수를 건너는 일에 빗대 설명한다. 호수 가장자리만 빙빙 돌며 헤엄을 치면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결코 건너편에 당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어로 몇 권의 책을 냈다.

타성을 깨뜨리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고육지책이었지만, 그의 도전은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준다. 찬송가 302장 가사가 절묘하다. 찬송 시인은 큰 바다보다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초대한다. 그러면서도 작은 파도 앞에서 주춤거리는 우리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풍랑이 예기되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언덕을 떠나지 못한 채 바다에 대한 노래만 부른다. 땅 위에 서서 는적거리는 동안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져 간다.

신앙의 길, 그것은 자기 확장의 길이 아니라 자기 부정의 길이다. 그렇기에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매력 없는 길이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을 실현하는 것이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지 않던가. 사람들이 계곡의 얼음을 보며 봄이 아직 멀었다고 말할 때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눈석임물을 보며 봄이 멀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미국의 위대한 교사로 일컬어지는 파커 파머는 ‘일과 창조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부름 받은 일은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는 측정 가능한 결과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한다면 이런 일은 오직 패배와 절망뿐일 거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도 가끔은 지치고 낙심한다. 하지만 직수굿하게 절망감에 빠져들 수는 없다. 마음을 안추르고 다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을 선물로 주신 분에 대한 예의이다. 파커 파머도 가끔 결과가 눈에 띄지 않을 때 실망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친구의 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얼마나 실적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신실한지 여부만 물어왔다.” 주현 절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내면에 세상의 어떤 어둠으로도 지울 수 없는 빛이 스며들면 좋겠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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