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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한 걸음



새로운 시간이 되면 늘 새로운 결심을 한다. 계획을 세우고 결심하는 것은 일종의 제의와 같다. 지켜지면 좋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다. 결심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구체적인 계획이나 결심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순리에 따르자’는 것이 기본 태도가 됐다. 그래서인지 언제든 새로운 출발선에 설 때는 세부 계획보다는 스스로 새롭게 들려주는 한 마디로 힘을 얻곤 한다. 올해도 그렇게 시작했다.

2016년 남편은 갑자기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조금 일찍 발병하셨네요’ 했다. 남편이 아직 60이 되지 않은 때였다. 진단은 이미 확실했지만 그래도 조직검사를 해야 했다. 일반적인 조직검사보다 어려운 수술이었다. 뇌를 열어야 했다. 급하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새벽 2시에 불려 나가 수술동의서를 쓰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수술 전 의례적 설명이라고는 했지만 남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극한 일들을 듣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다음 날 수술이 진행됐다. 수술실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수술의 진행 정도를 알리는 전광판을 보며, 알지도 못하는 수술 상황을 가늠하며 기도했다.

그러던 중 마음속에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라는 찬송의 후렴구가 무한 반복됐다. 평소에 찾아 부르지는 않는 찬송이었다. 찬송가를 뒤져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로 시작하는 찬송을 4절까지 계속 반복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이 수술에 함께해주시기를, 남편이 에녹과 같이 끝까지 주와 함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남편은 뇌종양으로 확진됐다. 그 후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여러 번 받으며 병세가 호전됐다. 내내 어려운 고비는 수없이 있었다. 그럴 때 깨달았다. 그렇구나! 그냥 한 걸음씩 가면 되겠구나! 감당할 수 없었던 고비도 그냥 한 걸음을 옮기니 그것이 또 다른 걸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고비는 지나고 다시 희망이 찾아왔다. 비로소 한 걸음의 비밀을 알았다. 높은 산이라도, 깊은 바다라도, 평온한 들판이라도, 그냥 한 걸음씩 가라는 말인가 보다! 누구도 단번에 몇십 걸음을 걸을 수는 없다. 아무리 보폭이 넓다 하더라도 그저 한 걸음일 뿐이다. 넓게 많이 걸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세계 신기록을 세울 일도 없는데 그렇게 빨리, 멀리 가겠다고 조바심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나의 보폭은 오직 주님에게만 맞추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주님과 함께 걷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주님이 가는 속도에 맞추어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그뿐이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그 속에 있는 고통과 절망은 주님의 위로와 평안으로 넘쳐나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삶은 충만해지지 않겠는가! 올해도 새로운 계획을 궁리하기보다 다시 그 찬양을 읊조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한 걸음씩만 가자! 주님의 보폭에 맞추자!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가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경주장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한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 달리기를 해야 하는 사람들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뛰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것은 넓은 보폭이나 빠른 속도가 아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면, 오직 한 걸음씩 걸어간다면, 그때 우리에게는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김호경 교수(서울장로회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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