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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프랑스 ‘귀화’ 한국 ‘귀국’… 대작가 문신 ‘쟁탈전’

올림픽공원에 설치된 조각 작품 ‘올림픽 1988’. 소마미술관 제공


조각가 문신(1922∼1995).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제공


문신의 화가 시절 대표작으로 꼽히는 ‘닭장’(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141×103.5㎝)은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국가에 기증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의 기존 소장품인 ‘정물’ (1959, 캔버스에 유채, 37.5×51.5㎝)


숙명여대 프라임관에 설치된 브론즈 작품 ‘해조’(1989). 문신 사후 그가 일군 문신미술관은 창원시에 기증됐고 숙명여대에 별도의 문신미술관이 만들어져 작품 보관과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제공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가본 적이 있다면 이 기념비적 조각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햇빛을 반사하는 은빛 스테인리스 방울이 쌍둥이처럼 두 줄로 나란히 서서 하늘로 치솟는 형상을 한 아파트 8층 높이 거대한 조각품 말이다.

‘올림픽 1988’이라는 제목의 이 조각은 1세대 조각가 문신(1922∼1995·아래 사진)의 작품이다. 올림픽조각공원의 시그니처처럼 강렬한 이 작품 덕분에 그는 대중에게 친숙한 존재가 됐다.

정부는 서울올림픽 때 문화예술행사 격인 세계현대미술제를 열면서 전 세계 유명 작가를 초청해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조각심포지엄은 작가를 초청해 현장에서 일정 기간 머물며 작품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 ‘엄지손가락’으로 유명한 프랑스 세자르 발다치니 등 약 40명의 국내외 거장들이 초청됐는데 문신도 포함됐다.

이건희 컬렉션에 문신의 작품이 포함된 것도 의외가 아니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 나온 문신의 작품은 조각이 아닌 회화 ‘닭장’이다. 문신은 조각가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어라, 문신이 회화를 했어’라고 놀랄 법하지만 그는 한국 나이 마흔인 1961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화가로 활동했다. 유학 갔던 도쿄 일본미술학교에서도 서양화를 전공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컬렉터 이건희 회장에게 미술작품을 중개했던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최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그분은 한국의 대표 작가 작품을 모으고자 했다. 조각 분야에선 작고 작가로 권진규, 생존 작가로 문신과 최종태의 작품을 집중 구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신은 초기에 화가로 살았으니 대표작인 그 작품을 구입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50년대에 그려진 ‘닭장’은 한 남자가 모자를 눌러쓴 채 닭장 앞에 앉아 있는 여름날의 풍경을 담고 있다. 사실주의라기보다는 풍경을 통해 심리를 표현하는 표현주의에 가깝다. 울화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톤과 일부러 원경을 없앤 구도, 짙게 깔린 암청색 하늘 등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문신의 아내인 동양화가 최성숙씨는 “남북이 이념 대립으로 분단된 상황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표현했다. 닭장 속의 닭은 국민을 은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50년대 화가로서 인기를 누리던 문신이 조각가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받을 법한 드라마틱한 감동이 있다.

그는 일본 규슈 사가현 다케오 탄광지대로 건너와 광산노동자로 살던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마산으로 귀국했지만 7세 때는 부모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서 커야 했다. 간판 그림에 매료돼 미술에 눈을 떴고 10대 시절부터 극장 간판을 그려주며 돈을 벌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화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16세 때 가족 몰래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 구두닦이, 산부인과 조수, 목수 등 온갖 잡일을 하며 이듬해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해방과 함께 귀국해 48년 서울에서 연 제1회 개인전에선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김용준이 ‘조선의 대작가의 탄생을 예감한다’고 쓸 정도로 화단의 기대를 받았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했지만 57년 한묵 박고석 천경자 정점식 등과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해 활동하며 반추상화의 길을 걸었다.

그는 첫 결혼이 실패하면서 61년 파리로 갔다. 사기를 당해 수중에 쥔 돈이 50달러뿐이었던 그는 동료 화가 김흥수의 소개로 파리 외곽의 중세 고성을 복원하는 일을 했다. 4년간 진행한 이 일을 통해 자신 속에 꿈틀거리는 조각가로서 기질을 발견하고 진로를 조각으로 바꿨다.

64년 귀국해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1년여 만에 파경을 맞았고 다시 프랑스로 가 79년까지 머물렀다. 두 번째 파리행에서 국제적인 화상 장 크라방을 만났는데 그가 70년에 남프랑스 발카레스에서 기획한 야외조각 심포지엄에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초청받으며 국제적인 작가로 데뷔했다.

71년과 72년에는 스위스 바젤아트페어에 연속 참여해 작품이 완판됐다. 두 차례 프랑스 체재 기간에 150차례 전시회를 하며 유럽에서 확실하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두고 파리의 평론가 자크 도판느는 이렇게 말한다.

“문신의 조각은 독특하다. 일단 좌우 대칭이다. 그런데도 유선형의 형태에 리듬감이 있다. 독창성이 있다. ‘이것은 다빈치다, 로댕이다, 백남준이다’ 하듯이 ‘이것은 문신이다’ 하게 된다. 그 형태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개미허리 같기도 하고 여인의 가슴 같기도 하고 누군가는 나비를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특정한 형체를 만든 게 아니지만 보는 이들이 구체적인 이름을 찾아낸다.”

그의 작품은 ‘시메트리’(symmetry), 즉 좌우균제 구조를 취하는 데도 운동감이 느껴진다. 한국인의 기상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한 올림픽공원의 그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구형태 강판공을 어긋나게 포갬으로써 생기는 긴장감과 율동감 덕분인데 밤에 보면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은 기세가 느껴진다.

이런 조각 형식은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문신에 따르면 건축은 “중량감이나 안정감, 역학적인 균형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자연 만물도 다 좌우균형으로 돼 있다. 식물을 보면 중심축에서 처음 떡잎이 두 개가 나와서 성장하지 않나.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생명체의 시메트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재료에선 나무의 경우 쇠처럼 무겁고 단단한 흑단을 선호한다. 녹슬지 않는 강철인 스테인리스스틸을 선구적으로 썼다. 재료가 갖는 힘과 중량감 덕분에 그의 작품에서는 약동하는 생명력이 분출한다.

프랑스와 한국은 문신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문신은 파리에 머물던 동양화가 최성숙과 사랑에 빠져 귀국을 추진했다. 프랑스 정부가 그에게 귀화를 제의했고 이를 전해들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같은 마산 출신인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을 비밀리에 파리로 보내 귀국을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두 사람은 80년 귀국했다.

귀국 이후 그가 한국 미술계에서 차지한 위상은 올림픽조각공원의 작품이 증거한다. 그는 작품 활동과 별개로 고향집이 있던 마산 추산동 언덕에 미술관을 짓는 숙원 사업에 착수했다. 손수 돌을 져 나르며 작품이 팔릴 때마다 진척시키는 바람에 14년이나 걸려 94년 개관했다. 그런데 완공되자마자 미술관 앞에 고층아파트 건립허가가 나버렸다. 상심한 끝에 2년 전 초기 진단을 받았던 위암이 악화돼 이듬해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는 7월부터 조각가 문신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전을 연다. 문신은 이미 1992년 파리에서 영국의 헨리 무어, 미국의 알렉산더 칼더와 함께 세계 3대 조각 거장의 한 사람으로 초대받아 전시를 열었다. 문신 기념전이 기대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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