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번성하는 생명처럼 부활은 풍성히 열매 맺는 알곡”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2021년 성탄절을 맞아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부활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은 “빨간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로 변장해 코로나 팬데믹 패러독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아론의 지팡이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한국의 1세대 기업가이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도의가 떨어질 때 나라가 망했다’고 역사를 해석했다.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잃을 때, 남을 헤아리는 성실한 마음이 바닥났을 때 종말이 온다고 내다봤다. 평생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이 회장은 1987년 10월 어느 가을날 절두산성당 고 박희봉 신부에게 손수 쓴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등 하나님에 관한 24가지 질문’을 건넸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답변을 듣지 못한 채 한 달 뒤 별세했다. 가장 현명한 답은 질문 속에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질문은 의문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패러독스로 지치고 절망한 지구촌 많은 사람의 손에 ‘기적의 지팡이’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故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 재정리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왜 사회 범죄와 시련이 많은가요.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지만, 사회 범죄가 많은 것도 사실이에요. 한밤중 비행기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면 십자가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는데도요. 한국교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집 건너 교회가 없고 신자도 없고 사회 범죄도 없고 시련도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은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다들 부정적일 것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고통스러워도 자유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쪽을 택하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체제, 이미 다 깔아놓은 선로를 달리기보다 허술한 자동차라도 자기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벌판을 원하는 마음과 같지요. 또 다른 시각에서 봅시다. “마스크 쓰고, 손 씻고, 거리두기 하는데 왜 코로나가 안 없어지나요?” 하고들 물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마스크 안 쓰고, 손 안 씻고, 거리두기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가 많은 것과 범죄자가 많은 것은 인과관계가 없고, 만약 교회가 없었더라면 더 많은 범죄자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반박해도 반론하기 힘들 겁니다.”

-지구의 종말은 올까요.

“종말은 옵니다.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그걸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걸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수치 증대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지요. 형태 있는 건 무너지고, 질서 있는 건 무질서가 되고, 따뜻한 건 차가워지는 것이지요. 끓는 물도 끝에 가면 어떻게 되나요. 열은 식고 끓어오르던 물방울의 비등하던 운동은 잠들어 조용해집니다. 한마디로 지구는 끓는 물이 식어가는 거대한 냄비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예외가 하나 있어요. 생명입니다. 생명은 거꾸로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스물이 돼요. 둘이 결혼해서 애를 넷만 낳아봐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요. 엔트로피의 역(逆) 현상입니다. 무질서하고 힘없는 아이가 거꾸로 질서와 힘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끓는 냄비가 식어가는 것과는 반대로 차가운 냄비가 뜨겁게 끓어올라요. 아이들은 다시 뜨겁게 끓어오르는 냄비입니다. 식은 게 뜨거워지고, 무질서한 게 질서로 가고, 그게 생명체의 신비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예수에게 악마가 돌을 떡(빵)으로 만들라고 했어요. 그러면 다들 옳다, 좋다 할 거 아니에요. 길에 있는 떡을 먹는데 굶주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천 년쯤 지나봐요. 돌이 새끼 쳐요? 돌은 다 없어져요. 흙을 파먹어요? 흙도 다 없어져요. 예수님이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주셨는데 마지막엔 그 기적을 만들어주신 예수님 성전 돌기둥까지 파먹어요. 그런데 땀 흘려서 곡식을 심어보세요. 열 개를 먹어도 백 개가 되고, 백 개를 먹어도 천 개가 되고, 시간이 흘러도 안 없어져요. 그게 생식입니다. 그게 생명이에요. 여자는 아이를 낳고 남자는 노동을 해서 곡식을 가꾸는 것이 돌멩이를 빵으로 만드는 방법이에요. 영원히 사는 길이지요. 돌멩이를 빵으로 만들면 당장은 누구나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석유가 고갈되듯 언젠가는 그 돌멩이도 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고비사막에 모래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먹는다면 언젠가 다 없어져요. 그런데 생식하는 한 톨의 보리는 천년만년 가도 늘어나요. 그게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종교는, 특히 기독교는 죽음을 넘어서는, 엔트로피 증대를 역행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저는 뉴턴이 한쪽만 바라본 사람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떨어지는 것만 봤지 그 작은 풀이 하늘을 향해 자라고, 나무가 되고, 거기에 빨간 사과가 열려서 높이 매달리는 것은 보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라 뉴턴이 보지 못한 하늘로 올라간 사과, 그 생명의 역 엔트로피를 봐야 합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믿어야 해요. 작은 송사리 떼가 잉어나 오른다는 상류를, 등용문을 통과하듯 향해가는 그 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고기라도 죽은 고기는 흰 배를 내놓고 떠내려가지만, 송사리는 아무리 작아도 살아서 이렇게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요.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는 진리요, 생명이니라”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부활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요. 한 알의 곡식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거기서 수십 개의 열매가 열려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일종의 작은 부활이지요. 보세요. 우리 선조들 생명이 부활한 것처럼 바로 지금 이렇게 숨 쉬고 기지개 켜고 아침 산책을 준비하는 내 모습이잖아요. 육체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모든 책도 선인들의 정신이 무수히 많은 책 제목으로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에요. 책은 모두 죽은 자들의 사상의 부활인 것이나 다름없지요.”

-코로나 패러독스가 몰고 온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스물다섯 가지 질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신학자나 과학자처럼 실증주의자들은 이런 말 못 합니다. 역시 선생님이기 때문에 이런 대답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대답을 나는 학술적 실증론이 아니라 비유와 스토리텔링 그리고 유추와 상상력으로 꾸몄습니다. 신은 기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세모꼴이 아니라 원주율처럼 영원히 끝이 없는, 쪼개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비길 바는 아니지만,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 쓰는 까닭도 거기에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이 비유로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직접 토로하기도 해요.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13:13) “내가 말할 때에는 비유로 말하겠고 천지 창조 때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내리라”(마 13:35)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눅 8:10)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도저히 인간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할 수 없을 때, 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하고 말해요. 그런데 특히 예수님은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알고 떠날 때 제자들에게 기막힌 말을 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헤어지는 고통을 임신부가 어린아이를 낳는 고통에 비유한 거예요. 애를 낳으려면 고통을 느껴야 하잖아요. 너희들과 내가 다시 새롭게 만나기 위해서는, 즉 부활하기 위해서는, 산모가 어린애를 낳는 그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어린아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기쁨 또한 맞이하게 되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이 뜻을 못 알아들어요.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거지요. 그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 기가 막힌 얘기예요. 비유로 말하지 않겠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뜻이 현실에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유가 필요 없어요. 저는 여기가 결정적인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 회장의 물음에 대해 모두 비유 아니면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했지만, 저의 비유는 그냥 비유로 끝나고 말았지요. 예수님이 말씀한 비유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실현’에 대해서는 나는 모릅니다. 침묵할 수밖에요. 그래서 한 나무꾼 이야기로 끝내려고 해요. 나무꾼이 산속을 헤매다 신선을 만났습니다. 신선은 자신의 존재를 들키면 발견한 사람에게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게 되어 있었지요. 신선은 나무꾼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어요. 나무꾼은 금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신선이 지팡이로 돌을 치니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그걸 본 나무꾼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나 금덩어리 말고, 그 지팡이 주시오.” “신선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주의 지팡이, 금덩어리가 아니라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가 나고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이 함께 뒹구는 참사랑과 그 기쁨을 만드는 하나님의 그 기적의 지팡이를 단 한순간이라도 저에게 주십시오, 라고……. 아니,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주소서…. 이것이 글 쓰는 나무꾼, 산속을 헤매는 나무꾼의 꿈입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입니다. ‘기적의 지팡이’를 받고 싶으신지요.

“글을 쓰는 저 같은 사람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나무꾼들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매일매일 산속에 들어가 나무를 하듯 글의 소재를 구하고 이야기의 자료를 모으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는 정말 그 이야기에 나오는 행운의 나무꾼처럼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고 생각이 막혀 끝없이 깊은 산중을 헤매다가 그 끝에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지팡이로 돌을 때려 황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나무에서 새싹이 나오고 그것이 꽃봉우리가 되고 꽃봉우리는 꽃이 되어 아몬드의 열매를 맺은 아론의 지팡이 같은 기적을 일으키시지요. 이집트를 탈출하는 난민을 도와 힘을 주었습니다.

우연히도 제 메시지가 끝나는 오늘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빨간 망토의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그 기적의 지팡이를 한순간만이라도 좋으니 저에게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당신께서 말한 ‘사자와 양이 함께 놀고 독사와 아이가 한 구덕에서 지내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