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조물이 조물주가 되려 한 원죄, 사회 전체 시스템에 내재”

2013년 12월 15일 새책 ‘생명이 자본이다’의 출판기념회 겸 팔순 잔치가 열린 서울 중구 서소문로 호암아트홀에서 이어령 전 장관이 부인 강인숙 전 건국대 교수와 함께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이어령 전 장관은 교수이자 평론가이며 시인 겸 소설가 등으로 호칭이 다양하다. 젊은 시절 지성의 대가로 정평이 났지만 구순을 앞두고 영성의 거두로 변신, 창조의 우물을 긷고 있다. 국민일보DB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대한민국의 주요 역사적 고비마다 시대정신을 밝히는 굵직한 담론을 내놨다. 20대 시절인 1950년대엔 기성문단에 대한 권위주의적 맹목적 신봉을 비판하며 ‘우상의 파괴’라는 평론을 발표해 이목을 끌었다. 30대에는 한국문화론을 설파했다. 50대 들어서는 서울올림픽 슬로건인 ‘벽을 넘어서’로, 60대 키워드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였다. 새천년 문턱을 넘던 70대엔 차가운 디지털이 따뜻한 아날로그를 품어야 한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의 문을 열었다. 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상호보완성’을 강조했다. 2010년 80대부터는 ‘생명이 자본이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오기 전에 그는 이미 기독교 정신의 핵심 가치인 생명의 소중함과 상생의 가치가 우선 반영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병마와 싸우기도 힘겨운 구순의 문턱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했다. 귀 있는 자들의 몫은 경청이라는 말밖에 달리 형용할 길이 없었다.

‘故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 재정리

-인간의 오만과 코로나 패러독스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를 한몸에 지녔던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께서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셨을 때 던진 질문이지요. 그때 질문들이 지금 포스트 코로나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우러나오는 궁금증일 것 같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요. 인간도 생물도 모두 진화의 산물 아닌가요.

“진화 자체가 신의 프로그램이라면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창세기를 보면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동식물이 생기고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집니다. 이 모든 게 진화 과정과 거의 다를 게 없어요. 창세기에서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지는데 진화론도 인간이 제일 뒤에 만들어지잖아요. 태초의 빅뱅, 혼돈 속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물질과 에너지가 나누어지는 순간입니다. 이후 모든 진화 과정이 그 자체로 신의 섭리요, 기획이라면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요. 혼돈에서 질서로, 그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진화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날 DNA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신’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섬싱 그레이트(Something Great)’라는 표현을 쓸 뿐이지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 실낙원에서 복낙원으로 가는 과정을 진화론과 대비해 더 구체적으로 풀이해볼까요. 초기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원리가 먹고 먹히는 포식(捕食) 관계에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화론 자체가 더 진화하더니, 그 원리가 포식 관계가 아닌 미셸 세르(Michel Serre, 1930~2019)가 말한 것 같은 기생(Le Parasite) 관계, 숙주와 기생물의 관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런데 최근 학계에서 수없이 부정되고 거절되어왔던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5~2011)의 포식도 기생도 아닌 ‘심바이오시스(Symbiosis)’, 공생 이론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토콘드리아 이론이지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함께 나누고 서로 도와주면서 산다는 ‘코이노니아(Koinonia)’와 같은 얘기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공생이지요.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도우라고 하잖아요. 즉 진화의 원리는 포식과 기생이 아닌 공생으로, 기독교적 가치관과 다를 게 없습니다. 참고로 린 마굴리스는 기독교 신자도 아니에요.

-언젠가 생명합성과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요.

“30여 년 전에 했던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오늘의 바이오기술 B.T, 나노와 로봇의 N.T, R.T 그리고 인공지능(AI) 시대를 예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한 문제라 차라리 한 편의 우스개 이야기로 답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어느 날 초능력 AI 로봇이 신에게 도전합니다. “당신이 만든 인간과 내가 만든 인간, 어느 쪽이 더 우수한지 내기를 해봅시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으시면서 “어디 한번 해봐라” 하고 말해요. AI 로봇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처럼 흙을 모아 반죽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잠깐, 내가 만든 흙에 손대지 마. 흙도 네가 만들어”라고 했어요. 로봇을 만드는 금속, 플라스틱 같은 원자재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어요? 지구에 있는 모든 원자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신 창조주의 선물이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요.

“지금까지 앞에서 다 다루었어요.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려고 한 것. 휴브리스, 인간의 오만, 그것을 원죄라고 하지요. ‘오리지널 신(Original sin)’은 무엇을 훔치는 것 같은, 개인이 저지르는 죄를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사회 전체 시스템에 내재하고 있는 문명과 사회 자체에 죄가 있다는 겁니다.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예요.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로 하여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나요.

“그걸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인간만 자신과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었어요. 흙을 빚어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 것. 흙은 육체요, 숨은 성령, 스피릿(spirit)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흙에다 불어넣은 영, 그게 자유의지예요. 다른 짐승들에게는 주지 않았어도 인간에게는 준 것.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게 물리적 장치를 하지 않았어요. 그저 스스로의 의지로 따먹지 말아라, 하고 말했을 뿐이죠.”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 그것도 인간이 만든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밥’이라고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맘마’라고 해요.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물으니 예수님이 “거듭나거라” 얘기해요. 그러자 니고데모가 “제가 나이가 몇인데 어떻게 어머니 속으로 다시 들어가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요. 그때 예수님은 “네가 사람의 말로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알아듣겠느냐”(요 3:2~4, 12)고 답답해하십니다. “거듭나거라.” 이것은 비유로 얘기한 것입니다. 진짜 다시 자궁에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성서에는 인간의 말 뒤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어요. 우리는 이를 통해 비유의 참뜻을 짐작할 수 있어요. 그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목사님, 신학자들이고 종교 연구가들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알아듣지 못해요. 거듭나라고 하면 말 그대로 진짜 자궁에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것인 줄 압니다. 성경은 알다시피 아람어를 히브리어, 그리스어로 옮긴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다시 라틴어로 옮기고, 또다시 각 나라말로 옮긴 것이지요. 성서 무오류설이란 그 진리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지, 번역된 자구 하나하나가 절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저마다 기술해놓은 것이 다 달라요. 똑같은 관용성서이지만 기술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그대로 남겨두지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 거예요. 한 사람에 의해 고쳐지거나, 인간의 논리에 앞뒤가 맞게 편찬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게 돼요.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저마다 다르게 듣는 수밖에 없어요. 다만 그것을 정직하게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들은 대로 옮기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고치는 게 아니에요. 신약의 경우가 특히 그렇지요.

-하나님은 왜 히틀러나 스탈린 그리고 갖은 흉악범 같은 악인을 만들었을까요.

“이 질문을 히틀러에게 해보세요. ‘하나님은 왜 유대인 같은 악인을 만들었는가?’ 하고 역으로 질문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악인을 죽였노라.’ 말할 거예요. 남북전쟁에서 남군과 북군이 기도할 때 뭐라고 할까요? 분명 ‘내가 상대하는 적은 모두 악인이오니 반드시 내가 오늘 전쟁에서 이기게 하소서’ 하고 얘기할 거예요. 남군이고 북군이고 똑같이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서로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남군과 북군이 동시에 하나님을 느끼고 그 사랑과 평화의 품에 안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영국군 사이에 일어났던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참호 속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군인들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것처럼요. 독일 병사들이 캐럴을 부르고 촛불을 켤 때 그 소리를 듣고 영국군들이 참호 속에서 뛰어나와 함께 캐럴을 부릅니다. 그러자 독일군도 전쟁을 잊고 참호 속에서 기어 나와요.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전쟁은 휴전과 같은 화해의 무드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분명한 기적이었지요. 그들이 같은 기독교 문화를 공유하였기에, 어린 시절 촛불을 켜고 캐럴을 부르며 하나님을 맞이했던 평화의 기억이 있었기에 그런 엄청난 기적이 가능했던 것이에요. 공감의 신이 전쟁의 신보다 크고 강했던 것입니다.”

윤중식 종교기획위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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