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가 봉은사·범어사 주지 승인해야 취임

봉은사가 1945년 6월 ‘일본군 전몰장병 충령탑’을 완공해 봉헌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 기사. 봉은사에선 일본군 전몰장병 충혼위령제 및 수륙제, 중일전쟁 4주년 기념법회 등도 개최됐다. 국민일보DB




기독교가 해방 이후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기 전에, 불교와 천주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아본다.

불교는 교리상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만큼 갈등 요소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신사참배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서로 융합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6세기 일본에 불교가 전해졌을 때 일본인들은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의 틀 내에서 신도의 신들을 수용했다. 그래서 신도는 불교적 색채를 가진 신도로 변화됐다.

불교 승려들은 여러 신사의 경내에 신궁사(神宮社)라는 특별한 절을 세워 봉헌했다. 그리고 신도의 여러 신을 불교식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신도의 유명한 신들에 대해 불교의 보살이나 부처의 화신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예를 들어 아마데라스는 신도의 근본 신이자 태양신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부처 가운데 한 명인 ‘대일여래’(大日如來)의 현현이라고 주장했다. 또 각각의 특성에 따라 스사노오신은 약사여래, 하치만신은 아미타여래, 이자나기신은 석가여래, 이자나미신은 천수관음의 화신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메이지 천황이 등극하면서 국가 신도를 체계화해 불교 색채를 제거하고 신도의 지위를 격상했다. 왜냐하면 위대한 천황의 조상신들이 부처보다 낮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융화된 두 종교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 후 우리나라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됐을 때, 조선 불교는 교리상 크게 저항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일제에 협조했다. 조선총독부는 불교계를 포섭·통제하기 위해 1911년 사찰령을 제정하고 31개 본산을 중심으로 1500개 사찰, 7000여명의 승려를 통제했다. 봉은사 범어사 통도사 등 본산의 주지는 조선총독부 총독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었으며, 본산이 지역 말사를 모두 관리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당시 불교는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놓였다.

193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가 종교인들에 대해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요했을 때 불교도 적극 협력했다. 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봉은사 등 주요 사찰에선 중일전쟁 승리를 위해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와 ‘일본군 전몰장병 충혼위령제 및 수륙제’, 그리고 기념 법회 등을 개최했다. 그리고 거액의 국방헌금과 출정 장병 위문금을 헌납했으며,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한 철제류들을 헌납하기도 했다.

불교와는 달리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받아들였다. 천주교는 1925년 ‘교리교수지침서’를 발간해 신사참배는 이단이므로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한국 천주교는 이미 조상제사 문제로 5번의 극심한 박해(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 문제는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1932년, 일본 천주교회가 먼저 신사참배를 수용했다. 로마교황청에서도 1936년 5월 25일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는 신사참배에 대한 교황청의 훈령을 내렸다.

교황청의 이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일본과 일찍부터 관계를 맺어 1919년 도쿄에 교황청 대사관을 설립했다. 1942년까지 3국 동맹을 맺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고 연합국 가운데 어떤 국가와도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또 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국방헌금을 일본 외무성에 보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적극 협력하도록 극동의 모든 교회에 지시했다. 따라서 교황청의 이 결정에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정치적인 고려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의 훈령이 내려지자 한국 천주교회는 1936년 6월 12일 ‘전선(全鮮) 5교구 연례주교회의’를 통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그뿐 아니라 그와 함께 그동안 조상숭배라고 금지해 왔던 제사도 과감하게 수용했다. 과거 박해의 역사를 거울삼아 정부의 박해로부터 천주교를 온전히 보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결과 한국 천주교는 일본 강점기 개신교처럼 박해받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은 그 이후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1951년 일본 천주교에서는 바티칸에 두 번째로 신사참배에 대한 지침을 요청했다.

이때도 교황청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같은 답변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1945년 야스쿠니 신사를 폐쇄하는 문제로 고민할 때, 천주교의 두 신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존속하도록 건의했다. 이것은 야스쿠니 신사가 존속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천주교가 전반적으로 신사참배를 수용했지만, 천주교 신자 가운데도 소수는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수난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오창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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