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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건강] 우울증·파킨슨·조산예방… 약물치료 대안 ‘전자약’이 뜬다

손목시계처럼 착용해 손떨림 등 파킨슨병 증상을 개선하는 전자약. 국제학술지 네이처 제공
 
①은 국내에서 처음 승인된 우울증 치료용 전자약. 헤어밴드 장치에서 발생한 전기 신호가 뇌 전두엽을 자극해 우울 증상을 줄여준다. ②호흡 곤란을 겪는 코로나19 환자 치료를 위해 개발된 미주신경 자극기. ③머리에 붙인 장치로 전기장을 발생시켜 암세포를 억제하는 뇌종양 치료용 전자약. 각사 제공
 
신체 특정 부위만 자극·기능조절
먹는 약·주사제 부작용 고민 줄여
우울증 치료 전자약 국내 첫 승인
악성 뇌종양·코로나 등 영역 넓혀
약이나 주사제 등은 혈관을 통해 온몸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질병 치료 효과 외에 부작용이 따르는 문제가 있다. 실제 미국에서는 질병 치료를 위해 먹는 약물로 인한 부작용이 매년 200만건 넘게 보고된다. 약물 부작용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면서 이를 대체할 방법들에 대한 연구개발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 중 ‘전자약(Electroceutical)’이 근래 주목받는다. 국내에서도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을 받은 첫 우울증 치료 전자약이 나왔다.
 
약물 대신 빛, 전기, 초음파로 자극

전자약은 전자(electronic)와 약(pharmaceutical)의 합성어로 빛이나 전기, 초음파, 자기 등의 자극을 이용하는 점에서 약물 치료와는 구별된다. 특정 부위 및 표적 장기에 선택적으로 적용해 신경 회로를 자극하고 대사 기능을 조절함으로써 신체의 항상성을 회복 또는 유지하는 원리다. 기존 약들이 혈관을 타고 돌면서 원치 않는 부위에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데 비해 전자약은 치료가 필요한 특정 부위만 선택해 자극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2013년 제약사 GSK가 전자약 용어를 사용해 제품 개발에 뛰어들면서 본격 통용되기 시작했고 2018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10대 유망기술로 선정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자약은 약이 아닌 의료기기다. 임상시험을 통해 치료 효과를 검증받고 식약처 허가를 거쳐 의사 처방으로 환자에게 제공된다. 신의료기술평가를 통해 인증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반인이 흔히 쓰는 건강 보조기기와는 다르다.

전자약과 혼용되는 디지털치료제(Digital Therapeutics)와도 구분해야 한다. 디지털치료제는 과학적·임상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질병의 예방·관리·치료를 목적으로 개발된 소프트웨어 의료기기다. 우울증 등 정신·신경계 질병이나 비만 치료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가상·증강현실(VR·AR), 게임 등의 형태로 개발된다. 전자약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장비나 장치 등이 필요한 하드웨어 기반이다.

2017년말 프랑스 국립인지과학연구소 연구진은 교통사고로 15년간 의식이 없던 환자의 신경에 3개월간 전자약으로 전기 자극을 줘 의식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례는 전자약의 가능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2014년 공동기금을 조성해 전자약 개발 이니셔티브를 마련했고 대상 질병, 치료 장치, 자극 패턴 등을 다양화하며 전자약 발전을 이끌고 있다.

우울증 같은 신경·정신질환, 치매·파킨슨병 등 난치성 뇌질환, 수면무호흡증, 과민성방광증후군, 크론병, 안구건조증, 류머티즘성관절염, 비만은 물론 최근에는 악성 뇌종양, 코로나19 치료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는 추세다. 현재까지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은 것만 10여종에 이른다.

2019년 미국 칼라헬스케어사는 손목시계처럼 착용해 파킨슨병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해 FDA로부터 승인받기도 했다. 손목을 지나는 요골신경을 전기 신호로 자극하고 이를 뇌 시상하부에 전달하게 해 손떨림 등 파킨슨병 증상을 줄여주는 원리다. 또 노보큐어사는 기존 항암제와 병용하는 뇌종양 치료 전자약을 최초 개발·출시했다. 머리에 붙이는 장치로 종양 부위에 저전력의 전기장을 발생시켜 암세포 분열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환자 치료용 전자약도 FDA 긴급승인을 받았다. 일렉트로코어사가 개발한 뇌 미주신경 자극기는 호흡곤란을 겪는 급성 코로나19 환자에게 기존 약물이 듣지 않을 때 사용할 수 있다. GSK와 구글의 합작 기업은 2023년까지 7억 달러를 투자해 류머티즘성관절염 전자약을 개발 중이다. 쌀알만 한 크기의 소형장치를 몸 속에 삽입해 전기 자극으로 관절염 증상을 개선하는 개념이다.
 
국내 가이드라인 아직 없어

한국도 올해부터 전자약 개발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전자약 산업육성을 위한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고 국책연구기관과 의료기관, 스타트업 등이 연구개발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고려대 안암병원 산부인과 안기훈 교수팀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과 함께 올해 초 이른둥이 출산(조산)을 막을 수 있는 전자약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도넛 모양의 신경 전극 기기를 자궁 경부에 삽입해 자궁 수축 신호를 실시간 감지하는 장치다. 조산은 자궁이 불규칙적으로 수축하는 증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전자약은 자궁 수축 감지 후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신호를 발생시키는데, 교감신경이 자극받으면 자궁 내 근육이 이완되고 수축을 억제해 조산을 막는다. 안 교수는 “동물실험에서 효능과 안전성을 확인했으며 향후 사람 대상 임상시험을 거쳐 상용화될 경우 조산으로 인한 영아 사망률 감소와 신경학적 장애 등 합병증 예방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10월에는 집에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전자약(마인드스팀)이 국내 최초로 식약처 승인을 받아 출시됐다. 미세한 전기 자극 장치를 머리에 착용해 우울증의 원인인 저하된 뇌 전두엽 기능을 정상화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대학병원 6곳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에서 6주간 매일 30분씩 단독 적용한 결과 우울 증상이 사라지는 관해율이 62.8%로, 기존 항우울증약(약 50%)보다 높았다. 의사가 환자 진료 후 병원용 장치에 전류의 강도, 자극 시간 및 빈도 등의 처방 정보를 입력하면 환자가 처방 내역이 저장된 휴대용 모듈과 전기 자극을 전달하는 헤어밴드를 가져가 집에서 이용한다. 처방대로만 장치를 사용할 수 있어 오남용을 원천 차단한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항우울제에 거부감이 있는 환자들에게 치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안구 건조증, 녹내장 수술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시신경 손상을 전기 자극을 이용해 회복하는 안과질환 전자약, 강한 자기장을 통과시켜 내부 근육 및 신경세포를 활성화해 만성 통증을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 중인 스타트업도 있다.

전자약이 기존 의약품을 대체하거나 병용해 치료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지만 국내에선 개발 초기 단계여서 허가·심사 가이드라인도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는 일반 의료기기 허가 가이드라인에 준해 승인심사가 이뤄진다. 식약처 관계자는 29일 “전자약의 정의와 대상, 허가 범위, 심사 방안 등을 명확히 해 내년에 맞춤형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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